누군가 당신을 궁금해 한다는 전갈이 이메일에 들어온다. 소셜 네트워크의 선두 주자 페이스북으로의 초대다. 인터넷이 소통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오늘날, SNS, 그러니까 소셜 네트워크로 얽혀있는 세계에서 연줄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 또는 왕따라는 걸 인증이라도 하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우편함보다 더 자주 들여다보는 이메일에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찾는 친구가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나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찾는 이의 소식을 알려면 먼저 중간 다리 노릇을 한 SNS에 회원으로 가입해야 한다. 몇 번은 귀찮아서, 또는 친구랍시고 찾는 사람이 굳이 그런 소셜 네트워크를 거쳐 확인하고픈 사람이 아니라서, 아니면 이미 다른 온/오프라인 세상에서 필요한 정도의 연락이 충분히 이루어지는 사이라서 친구 찾기 메시지를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런 부름에 이끌려 가입을 하게 되면 갑자기 세상이 달라진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찾는 사람이 늘고, 굳이 그 방법으로 찾는 게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들어서게 되는 SNS의 세계는 그야말로 겉보기로는 ‘작은 세계’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다섯 다리만 건너면 어느 누구와도 이어질 수 있다는 ‘여섯 단계의 분리’라는 개념은 SNS를 통해 60년대에 하버드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실험을 통해 증명해보였던 것보다 더 간단하게 ‘작은 세계’의 실체를 보여준다. 밀그램은 정확한 주소 없이 미국 중서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보스턴에 사는 낯선 사람들에게 도착할 수 있는 지를 실험했고, 이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미지의 보스턴 사람들을 알고 있을 법한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놀랍게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건네어진 편지의 절반가량이 다섯 사람, 그러니까 첫 발신자로부터 여섯 단계를 거쳐 보스턴 사람들에 전달되었다.

사람들 각각 친구가 100명 있다고 가정한다면, 한 다리 거칠 때마다 친구가 100곱씩 늘어나 다섯 번을 거치면 무려 100억 명과 연이 닿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서로 겹치는 관계도 있고, 인간관계가 어마무지하게 넓거나 좁은 사람도 있을 테니 꼭 이런 산술적 계산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몇 다리만 건너면 연줄연줄 이어지는 세상이라는 건 신기하지만 사실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새 영화 <소셜 네트워크>는 이 연줄의 고리에 기원이 있고, 그 기원이 동시대이며, 첫 초대장이 보내진 지 겨우 6년 만에 무려 5억 명이 고리에 고리를 이어 60억 인구 가운데 5억 명이 엮이도록 만든 페이스북의 내력을 짚어낸다.

밀그램처럼 하버드 대학에 적을 둔 마크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는 머리는 비상하지만 성격이 괴팍해서 연애나 대인관계는 젬병인데다가 배경이나 연줄이 보잘것없어 최고 엘리트 집단에 끼지도 못하는 주제에 제 잘난 맛을 남이 알아주지 않는 걸 인터넷에 까발리는 것으로 푸는 심하게 뒤끝 많고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천재다.

   
  ▲ 영화 '소셜네트워크'  
 
   
  ▲ 영화 '소셜네트워크'  
 
<소셜 네트워크>는 이런 마크가 출세의 발판이 될 대학 내 엘리트 클럽 가입은 어렵고, 자기가 얼굴은 예쁘지만 학벌은 별 볼일 없다고 무시했던 여자 친구에게는 결별 당하게 된 아름답지 못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똘똘함은 과시해야겠고 자기를 무시한 사람들에게는 본때를 보여줘야 하겠는데, 얼굴 맞대고는 영 글렀으니 기왕 갖추고 있는 연줄에 약간의 자본을 보태 존재증명도 하면서 떼돈도 벌 수 있는 방법으로 짜여진 프로그램이 페이스북이란다.

마크 주커버그의 실제 상황이 영화 속 캐릭터와 정확하게 얼마만큼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이미 <파이트 클럽>(1999)에서 이런 사회적 관계망의 허망함을 그렸더랬다. 삶의 공허함을 서로 피터지게 주먹질하며 살 속 깊이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해소하려는 현대인의 소외감은 멀쩡한 회사원 잭(에드워드 노튼)이 괴짜 떠돌이 타일러(브래드 피트)와 만나면서 오고가는 주먹 속에 흐르는 피를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는 ‘파이트 클럽’을 만들도록 한다. 이 무시무시하게 가학적인 클럽은 곧 전국적인 조직이 되고, 사회를 위협하는 엄청난 기획으로 네트워크의 힘을 과시하려 된다. 네트워크가 커질수록 타일러는 폭주하고 잭은 경계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잭이 타일러요, 타일러가 잭이었다. 둘 가운데 하나는 죽어야 현실로의 복귀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소셜 네트워크 상에서 실제 ‘나’와 가입자 ID로 존재하는 ‘나’는 일치하는 걸까? 페이스북에서 나를 찾는 친구가 현실 세계에서 정말로 나를 친구로 호명하는 걸까? 출신학교, 관심사, 직업까지 탈탈 털어 내보이면 시스템이 저절로 찾아 권해주는 친구 말고, 내 감정과 정서의 오르내림을 짚어 손 내미는 친구는 이미 담벼락에 주절대지 않아도 친구로 있을 텐데.

   
  ▲ 영화 '소셜네트워크'  
 
   
  ▲ 영화 '소셜네트워크'  
 
   
  ▲ 영화 '소셜네트워크'  
 
‘5억 명의 ‘친구’가 생긴 순간 진짜 친구들은 적이 되었다.‘는 <소셜 네트워크>의 홍보 문구는 섬뜩하지만, ‘전세계 최연소 억만장자’라는 타이틀 설명은 마크를 친구고 애인이고 간에 자기 과시와 이윤 추구 뒤로 제쳐놓는 모자란 인격체로서 딱하게만 보기 어렵도록 만든다. <파이트 클럽>에서처럼 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분유된 한 인격체의 죽음이 되는 건 참 딱하지만 <소셜 네트워크>처럼 이런 상황이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제현실이라는 것은 더 딱하다.

소셜 네트워크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작가 같은 유명 인사들의 일상이나 생각을 미디어의 왜곡 없이 바로 들여다 볼 수 있게도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직접적으로 생각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는 것은 어차피 원래 맺고 있던 연줄의 범위에 달려있다. 하버드는 하버드끼리였다가 조금 더 넓혀 아이비리그, 바다건너 캠브리지, 옥스퍼드까지 뭐 이런 식이다. 그 울타리 안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들여다볼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래도 소셜 네트워크의 그물에 한 코라도 걸고 계정을 갖게 되면 독백을 쏟아내든 유명 인사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기웃거리든 쉽게 끊어내기 힘들다. 남을 들여다보려는 관음증과 자신을 내보이려는 노출증 사이에서 소셜 네트워크 세상의 인간관계는 언제 차라도 한잔 하자는 빈말보다는 실체가 있지만 정작 진심을 전하는 소통의 다리가 되기는 어렵다. 마크가 가장 말 건네고 싶었고, 그 앞에서 으스대고 싶었던 옛 여자 친구를 페이스북으로 끌어들일 수는 있어도 ‘진짜 친구’가 되는 것은 여전히 소셜 네트워크 바깥세상의 일인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에서 데이비드 핀처는 결국 소통에 문제 있는 사람들이 SNS에 ‘열폭’한다는 것, 네트워크가 확장될수록 외로움이 깊어진다는 것, 나의 네트워크가 누군가에게는 곧 자산이 된다는 것, 넓게 열린 수다스럽고 허망한 관계의 그물에서 누군가 자기를 건져 올려 주었으면 하지만 그 구원은 소셜 네트워크가 아니라 얼굴 맞댄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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