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왠지 낯설다. 언제부터인가 잊혀진 말인 터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염치는 조물주의 깊은 사려가 깃든 ‘소품’이다. 막가는 세상을 바로잡아 주는 버팀목이다. 흉악범도 때로는 한 가닥 남은 염치로 마지막 칼날을 멈추는 법이다. 혼탁한 세상의 마지막 정화 탱크, 그 염치가 무너지고 있다. 특히 정치권, 언론, 지식인의 몰염치는 뼈아프다.

이명박 대통령은 염치없는 인물들을 유난히 선호한다. 그가 기용한 인물들의 면면이 이를 증언한다. 청문회장은 비리와 탈법 의혹의 경연장이었다. MB의 추천사는 한결같다. ‘능력을 갖춘 적임자.’ 결정적인 흠을 지닌 인물들이 고위직을 맡겠다고 꾸역꾸역 나서는 것도 수수께끼다. 청문회장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장면은 안쓰럽다. 정작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 한마디 사과로 넘어가는 관행은 굳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에겐 믿는 구석이 있다. 이명박 정권의 ‘파렴치한 인사 기준’이 그것이다. ‘그 정도는 나랏일을 보는 데 큰 흠이 아니다.’ 그 뻔뻔함에 국민은 다시 한 번 절망한다. 

MB ‘파렴치 인사기준’이 뻔뻔함 불러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09년 7월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현병철 인권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부자감세는 ‘MB 경제’와 ‘MB 철학’을 관통하는 상징물이다. MB는 ‘서민을 위한 경제’ ‘공정사회론’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터다. 소득세, 법인세는 아직 낮은 수준이다. 소득세 수준은 OECD 국가 중 아래서부터 헤아리는 게 가깝고, 법인세율도 OECD 평균의 3분의 1 선으로 알려져 있다. 부자감세는 기득권층에 대한 맹목적인 인심 쓰기다. 감세가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명분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양극화만 한층 심화될 뿐이다. ‘서민경제’ ‘공정성’은 염치없는 공염불이다.

정치 풍토의 쇄신은 아직 먼 나라의 꿈이다. 국민은 선거 때만 ‘하늘’이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은 국민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다. 표정은 자못 침통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사흘 가는 법이 없다. 선거철에만 반짝 국민 앞에 엎드려 표를 구걸하는 몰염치는 가관이다. 국민은 깊은 회의에 빠지곤 한다. “무슨 염치로 표를 달라고 구걸하는가.” “대통령의 독단에 침묵하는 ‘허수아비’ 여당이 왜 필요한가.”
덩달아 야당도 춤추고 있다. 민심의 밑바닥을 헤아려 뼈를 깎는 노력은 미흡하다. ‘여론조사 결과’라는 허울, 정치공학의 유혹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정치의 길은 하나다. 잃어버린 염치의 회복이 그것이다.

지식인의 침묵은 무섭다. 지식인의 구차한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이 눈에 띈다. 정운찬 전 총리와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그들이다. 정운찬 전 총리는 이명박 시대 지식인의 자화상이다. 그는 한때 신망의 대상이었다.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다. 대학 총장을 지낸 학자, 경제 정의를 생각하는 경제학자, 때 묻지 않은 선비, 미래 국가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지식인의 이미지는 대중을 끌어당겼다. 그는 즉흥적이고 시대착오적인 ‘MB 경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말은 일치하지 않았다.

지난 8월 그의 퇴임을 두고 이 대통령은 ‘아름다운 퇴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즉각 반론이 따랐다. 한 야당의원은 코웃음을 쳤다. “개그도 아니고,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그럴 듯한 촌평이다. 정 전 총리는 재임 중 자신의 소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로지 세종시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었다. 그것도 대통령을 대신한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경제철학이 대통령을 움직인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국민이 반대하는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방관했다.

그는 ‘대운하는 반대하지만 4대강 사업은 찬성’이라는 애매한 소신을 밝힌 바 있다. 그가 찬성의 명분으로 삼은 ‘수질 개선’은 옹색하다. “4대강 사업을 청계천 개념으로 이해해 달라”는 말에서도 학자의 한계를 느낀다. 4대강이 대운하냐, 아니냐는 무의미한 논란거리다. 4대강 사업은 자연을 파괴하는 반생명적 사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심은 이 사업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토건사업을 서두를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내정자 시절 ‘MB경제’에 대한 그의 촌평에서도 지식인의 말장난이 느껴진다. “최근에 직접 만나보니, 이명박 대통령과 나의 경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인권위원회 두 상임위원의 사퇴는 ‘사건’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인권정책에 대한 항거이자, 권력에 맹종하는 인권위원장에 대한 뼈아픈 충고이다. 현병철 인권위원장은 스스로 무자격자임을 고백한 인사다. 그는 임명권자의 입맛 따라 조직을 축소하고 인권위 운영과정에서의 전횡으로 이번 사태를 예고했었다. 인권위원회는 한낱 장식물로 여기는 정권과 인권위원장의 인식 수준이 서글프다. 그는 학자적 양심을 저버렸다. 부끄러움을 잊은 채 권력에 봉사하는 비겁한 지식인은 MB 진영 곳곳에 숨어 있다.

정운찬, 현병철, 언론도 구차하다

몰염치 사회는 염치없는 언론이 재촉하고 있다. 이른바 ‘조중동’과 방송에서 이명박 시대는 태평천국이다. 4대강 사업의 진실은 그들 언론에서 찾을 수 없다. 되풀이되는 MB의 인사난맥은 묵인·방조되고 있다. 고위직 후보자의 범죄도 작은 잘못, 인간적 흠결로 얼버무려진다. 공정사회론과 친서민정책에 대해선 보도자료 그대로 앵무새처럼 되뇐다.

북한의 3대 세습에 핏대를 세우면서도 정작 이명박 시대 인권의 뒷걸음질에 대해선 침묵한다. MB경제의 허상에 대한 심층보도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신문에 등 돌리는 독자들이 야속하단다. KBS의 수신료 인상 시도도 낯 뜨거운 일이다. 한때 KBS는 국민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 KBS에 대한 믿음은 추락하고 있다. KBS 내부에서조차 수신료 인상은 ‘염치없는 일’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몰염치한 세상에, 정의는 지나치게 거창한 구호다. 그것은 모래 위의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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