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다."

필립 제닝스 UNI(국제 사무직 노동자 네트워크) 사무총장은 21년 전 한국을 처음 찾았을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1989년은 6월항쟁 이후 민주화의 열망이 들끓던 무렵이었다. 대중적 노동운동이 이제 막 태동했고 급격한 고도성장을 반성하고 그 후유증을 치유하는 작업도 시작됐다. 그런데 다시 찾은 2010년 한국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듯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험하고 있다. 노동현실은 오히려 더욱 열악해졌다.

UNI는 국제적 산별 노동조합인 FIET(국제사무전문기술노련)와 CI(국제통신노련), MEI(국제미디어엔터테인먼트노련), IGF(국제출판노련) 등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노동자 네트워크다. 필립 제닝스 사무총장은 1997년 노동법 개정 투쟁 때도 내한한 바 있다. 필립 제닝스 사무총장은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 때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와 실업 문제 해결을 주제로 하는 서울 노동자 선언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필립 제닝스 UNI 사무총장. ⓒ이정환.  
 

필립 제닝스 사무총장을 2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건강보험 보험료 1만1천원을 더 내서 보장성을 90%까지 높이자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과 보건의료노조의 의료 민영화 반대 투쟁, 로레알 등 수입 화장품 판매원 노조의 연대 투쟁 등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다"고 개탄했지만 "지금이 오히려 기회"라며 "한국이 글로벌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한국 노동운동 진영은 타임오프 제도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에 들어와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한국 노동현실을 어떻게 평가하나.
"장기적으로는 노조가 자립하는 게 맞다고 보지만 외국에도 노조 대의원에게 기업이 임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있다. 노조 전임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노사가 자율 합의로 결정할 문제다. 한국처럼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의무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타임오프 제도는 명백히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제도다. 이런 적대적 노사관계는 기업에도 도움이 안 되고 나라 전체로도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클 거라고 본다. 내년부터 시작될 복수노조 허용도 큰 문제라고 본다. 한국의 노동현실은 오히려 퇴보하는 느낌이다."

- 한국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IMF(국제통화기금) 감독 아래 혹독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치렀다. 그 결과 기업들 이익은 해마다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한국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큰 나라는 없다. 비정규직 비율이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도 세계 최악의 수준이다. 90% 이상의 청년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열심히 일하면 충분한 보상을 받고 회사와 상호 협력해 함께 성장하는 시스템은 1세대 노동자들에서 끝났다. 버려진 2세대 노동자들은 이제 갈 데가 없다. 이건 민주주의에도 위협이지만 비즈니스에도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차별사회로 가는 것 같다. 패배와 좌절감, 무력감이 넘쳐나는 이런 사회는 생산성 혁신을 이룰 수 없다. 이런 시스템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 금융화(finantialization)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중요한 변화다. 주주 자본주의와 극단적인 수익 극대화 경영이 확산되면서 금융이 산업 전반을 지배하고 설비투자가 위축되고 고용도 늘어나지 않는 답답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단기 성과에 매몰되는 금융화의 문제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기 투자가 사라지고 제조업도 금융에 종속되고 있다. CEO(최고경영자)들도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걸 대가로 기꺼이 주주 자본주의에 복무한다. 주주들은 돈을 벌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악화되고 일자리도 계속 줄어든다. 한국은 외환은행 매각 사태에서 보듯이 금융화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금융 시스템의 탐욕을 통제하려면 최소한의 규제를 남겨둬야 한다. 규제를 다시 강화하고 사회안전망을 복원시키는 싸움이 필요하다."

   
  ▲ 필립 제닝스 UNI 사무총장. ⓒ이정환.  
 

- 한국은 특히 정부 공공지출 비중이 낮다.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공공부문 지출이 6.9%로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회원국 20.6%의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이명박 정부는 감세와 규제 완화를 명분으로 이를 더 줄이려고 하고 있고 사회적 연대 보다는 자기의 미래를 자기가 챙기는 각개약진의 사회로 가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는 평등 문제가 심각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격차가 너무 크다. 한국은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은데 내수를 부양하고 사회안전망 투자를 더 늘리지 않으면 성장의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지금 같은 위기 국면이 오히려 기회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양극화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동반성장(shared growth)이라는 어젠더를 확립해야 할 때다. 한국은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가 부족하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도 비정규직을 끌어안는 노력을 더 해야 하다. 일본도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했지만 지금은 조직률도 높아졌고 많이 개선됐다. 한국도 달라질 거라고 본다."

- 기업들이 더 낮은 임금을 찾아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빠져나가는 경우도 많다.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도 중요할 것 같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에서 노동 관련 이슈를 공식 의제로 올릴 계획이다. 자본의 글로벌 연대에 맞서 노동자들도 글로벌 연대를 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일자리 창출이 주요 의제가 될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세계의 중심이 돼서 연대를 제안해야 한다. 단위 사업장이나 개별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이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의 연대도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글로벌 협업이 필요한 때다. 좀 더 영향력 있는 연대가 필요하다."

- 그동안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많았지만 선언적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이번에는 다르다고 볼 수 있나. G20 회의 때 어떤 계획을 준비하고 있나.
"어제 G20 기획조정위원회 사공일 위원장을 만나서 이번 G20 회의 때 글로벌 유니언 노동자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번 G20 회의는 한국에도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회담이 성공하려면 다양한 각도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G20 정상회담에 우리의 의견이 전달되도록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정상회담에 앞서 열린 비즈니스 서밋에서 CEO 100명이 모이는데 사회적 책임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넘어 구체적인 노동 이슈를 반영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한국의 노동계도 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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