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장상이었을까?"

서울 은평을 재보선을 취재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고, 가장 큰 궁금증이기도 했다. 장상 민주당 후보는 김대중 정부 당시 초대 여성 총리 문턱까지 갔다온 인물이고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인물은 분명하지만, 유권자 입장에서 "바로 이 사람이야" 할 정도의 흡인력은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기도 하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구시대 인물로 인식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상 후보는 1939년생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지만,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 역시 1944년생으로 두 사람의 나이는 5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생물학적인 나이보다는 정책과 노선, 이미지 등에서 참신성과 개혁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장상 후보 공천을 둘러싼 의문의 배경이다.

장상 후보 나이가 문제? 나이와 무관한 '참신함·개혁성' 부재

   
     
 
흥미로운 대목은 민주당이 장상 후보를 '전략공천'했다는 점이다. 은평을은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의 텃밭이지만, 사실 민주당이 약한 곳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전통적으로 호남 출신 유권자가 많은 편이고,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은평구청장을 포함해 시의원 등을 민주당이 싹쓸이하기도 했다.

민주당이 후보만 잘 골랐다면 이재오 의원과 진검 승부를 펼쳐볼 수도 있었던 지역이다. 민주당의 장상 후보 공천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장상 후보는 구 민주당 쪽에서 대표까지 지낸 인물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지금의 민주당이 탄생했다. 장상 후보 선거캠프에는 구 민주당 당직자들이 대거 합류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장상 후보는 민주당 비주류 중 하나인 구 민주당 쪽 인사들과 교감을 넓혀왔다.

정세균 민주당 지도부의 장상 후보 공천은 당권 경쟁을 둘러싼 전략적 고려도 담겨 있다. 장상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를 낙점할 경우 구 민주당 쪽의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 이는 정세균 대표의 당 대표 재선 도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장상 후보 버티기, 끌려다닌 정세균 지도부

정세균 지도부는 장상 후보를 전략 공천했다. 결과적으로 참담한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정세균 지도부가 다른 대안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손학규 전 통합민주당 대표 등 당의 간판급 인사를 전략 공천하는 방안을 고민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MBC 신경민 선임기자 영입이 급물살을 탄 것도 이 때문이다. 신경민 선임기자는 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내면서 촌철살인 '클로징 멘트'로 국민에게 인기를 얻었던 언론인이다. 신경민 선임기자 영입에 성공했다면 참신성과 개혁성을 담보한 인물을 전진 배치하면서 전체 재보선에 바람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현직 언론인이 곧바로 정치권에 합류한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이 있지만, 선거공학으로만 볼 때는 민주당에 안성맞춤 카드였다. 정세균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까지 나서면서 신경민 선임기자 영입에 공을 들였고, 신경민 선임기자 역시 재보선 출마 문제를 깊게 고민했다.

그러나 '장상' 벽에 부딪히면서 영입 시도는 불발됐다. 은평을 민주당 후보 공천에 사활을 걸었던 장상 후보 쪽에서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구 민주당 쪽 인사들은 정세균 대표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민주당, 신경민 MBC 앵커 영입 무산

   
  ▲ 경향신문 7월29일자 4면.  
 
신경민 선임기자는 7월9일 아침 자신의 트위터와 MBC 라디오방송 등을 통해 은평을 재보선 불출마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민주당은 7월9일 오전 장상 후보를 전략 공천한다는 소식을 언론에 알렸다.

이재오-장상 대결구도가 현실이 됐다. 누리꾼들은 민주당 지도부의 장상 후보 공천 소식에 냉소적인 글을 쏟아냈다. 처음부터 지고 들어갔다는 얘기가 중론이었다. 민주당도 이대로 가면 참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야권 단일화'에 집중했다.

야권이 분열하면 100% 패배이지만, 뭉치면 승리를 기대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등과 단일화 논의를 지속했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단일화 덫'에 빠지고 말았다.

단일화가 효과를 보려면 후보 등록 이전에 해야 했지만 7월13∼14일 후보 등록 결과는 말 그대로 야당 후보 난립이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 사회당까지 이명박 정부 국정운영에 비판적인 야당들은 진보신당을 제외하면 모두 후보를 냈다.

야권 단일화 성공했지만, 감동이…

단일화는 일단 후보 등록을 하면 쉽게 마무리되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 후보를 등록한 쪽 입장에서는 완주를 통해 10% 이상을 득표하면 선거비용을 돌려 받을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 단일화를 하더라도 선거운동은 해볼 때까지 해서 여론의 변화를 기다리는 전략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결국 단일화는 진통에 진통을 거듭하다 선거를 이틀 앞둔 7월26일 성사됐다. 이날 오후 서울 은평구 연신내역 물빛공원에서 야권 단일화 행사를 열면서 막판 세몰이를 했고, 실제로 바닥 민심의 변화도 엿보였지만, 결과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단일화 시기가 너무 늦은 것은 야권의 결정적인 패착 중 하나였다.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는 여권의 각종 악재 속에서도 '조용한 선거' 전략을 이어갔다. 한나라당 지도부 지원을 차단하면서 '홀로 선거운동'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조직을 총동원해 조직선거에 나서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인지도에서 떨어지고 조직기반은 비교도 안되고, 참신성과 개혁성까지 내세울 수 없는 민주당 쪽에서는 이명박 정부 심판론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참담한 현실만 확인했다. 그러나 정치권 모두를 긴장하게 만든 사건이 없지 않았다.

출근길 투표율 급등에 한나라당 긴장, 그러나…

바로 투표율이다. 선거 판세를 진단하는 가장 유용한 자료 중 하나는 투표율이다. 단순 투표율이 아니라 시간대별 투표율이 더 중요한 변수이다. 20∼30대 직장인들과 밀접한 출근시간대 투표율(오전 6시∼9시) 퇴근시간대 투표율(오후 5시∼8시)을 살펴보면 선거 판도의 흐름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은평을 출근길 투표행렬이 심상치 않다는 점이 감지됐다. 7월28일 오전 9시 현재 투표율이 10%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재보선은 휴일이 아니다. 직장인들이 투표를 하려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투표장에 나서야 한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투표장에 나서는 방법도 있다. 어떤 방법이건 유권자의 적극적인 정치행위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직장인의 투표 참여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은평을에 출근길 투표행렬이 몰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휴가철과 겹친 7·28 재보선 투표율을 20% 중반대로 예상했다. 상당히 저조한 투표율이 될 것으로 예측됐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은평을 투표 추세를 분석했을 때 30%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40%를 돌파할 가능성까지 있었다. 한나라당은 긴장 속에 은평을을 지켜봤다. 실제로 최종 투표율은 40.5%로 나타났다. 재보선을 고려할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18대 총선에서 은평을 투표율이 47.2%에 달한 것에 비한다면 총선에 버금가는 높은 투표율을 보인 셈이다.

투표율 높은데 한나라당 완승, 왜?

   
  ▲ 30일 최고위원회에 참석한 민주당 지도부. ⓒ사진출처-민주당  
 
은평을 선거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이재오 후보가 장상 후보를 눌렀기 때문이 아니다. 장상 후보가 이재오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게 오히려 '대이변'이었다. 이재오 후보의 득표율 58.3%와 장상 후보의 득표율 39.9% 등 두 후보의 득표율 격차가 18.4%에 달한 것은 은평을 선거가 한나라당의 완승으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상보다 큰 격차로 이재오 후보가 당선된 것보다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은평을의 높은 투표율과 한나라당의 완승 선거결과이다. 이는 재보선의 상식과 배치되는 결과이다. 재보선 투표율이 이상 급등하면 정권에 비판적인 유권자들이 대거 선거에 참여한 것으로 해석되는 게 상식이었다.

은평을 투표 흐름과 결과만 놓고 보면 이재오-장상 두 후보는 박빙 승부를 벌였거나 장상 후보가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했어야 했다. 한나라당 쪽도 긴장을 시켰던 은평을의 투표율 이상 급등은 정치적 상식을 무너뜨린 채 이재오 후보의 완승을 견인했다.

투표율 급등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재오 후보 지지층이 장상 후보 지지층보다 더 적극적으로 투표에 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선거에서 은평을에서 쓴맛을 봤던 보수층들이 더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재오 후보의 물밑 조직선거 전략이 빛을 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장상, 야권 지지층 투표동력 견인에 한계

또 하나는 장상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는 됐지만, 장상이라는 카드 자체가 야권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이끌 만한 흡인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상 후보에 표를 던진 사람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투표장에 나섰다기보다는 이재오 후보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투표에 참여한 이들도 있다.

야권이 단일화에 실패했다면 이번 선거는 거의 100% 이재오 후보의 당선이었다. 단일화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감동'이 약했고, 단일화 시너지를 만들어내기엔 이틀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민주당은 왜 은평을 선거에서 참패했을까.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교훈을 찾지 못한다면 진짜 큰 선거인 2012년 19대 총선과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참패'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정치인(정치세력)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상식적인 얘기 같지만 가장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유권자 마음을 얻고자 최선을 다했는가. 국회의석수로 볼 때 한나라당 절반 밖에 안 되는 '작은 정당'이 자만심의 덫에 빠져 있는데 어떤 국민이 그런 정당에 다시 힘을 실어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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