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도는 문제 게시물은 정리돼야겠지만 무지막지하게 몽둥이로 때리는 방식이 돼서는 안 된다. 이번 결정은 경찰을 포함한 국가기관이 포털에 인터넷 게시글 삭제를 요청할 때에는 최소한 법적 근거라도 갖춰달라는 당연한 요구다."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의 김창희 정책위원장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천안함 게시글 삭제 결정을 수용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말하자면 '공권력이 민간기업에 이용자의 권리를 제재하라고 요구하려면 불법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야 요구를 따르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는 얘기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주장이다. 문제는 그동안 이런 기본적인 상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포털들은 무분별한 게시글 삭제가 이용자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방통심의위의 시정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며 요구가 있을 때마다 해당 게시글을 대부분 삭제해 왔다. 민주당 최문순 의원실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방통심의위 '시정요구' 이행률은 99%에 이른다.

   
  ▲ 김창희 KISO 정책위원장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방통심의위가 천안함 침몰원인에 대한 인터넷 게시글 4건에 대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며 삭제 조치를 요구하자 한 포털이 이 결정이 정당한지 KISO에 물었고, KISO는 지난달 28일 정책위 회의에서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게시자의 의견 및 주장을 개진한 것으로 판단돼 '해당없음'으로 결정한다"고 거부 입장을 밝혔다. 정책위원 위원 11명의 만장일치 결정이었다. KISO 정책위원에는 각 회원사 관계자와 법학자, 언론학자 등이 참여하고 있다.

다음, 네이버, 야후코리아 등 6개 인터넷 포털사가 자율규제를 모토로 만든 민간인터넷자율기구인 KISO가 방통심의위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일은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일이 인터넷을 유해매체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한 현 정부에서 게시글 삭제 요구가 쏟아지면서 이용자의 이탈과 갈등을 겪던 포털사의 곪아있던 불만이 터져나온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 정책위원장은 일단 "방통심의위의 판단을 존중하고 따른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는 "심의 대상 게시글이 법적근거가 불분명하고 사회적 유해성을 입증할 만한 소명자료가 부족한 것이라면 방통심의위가 시정요구를 결정했다고 해도 재심의를 해 이용자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라고 분명한 원칙을 밝혔다. 방통심의위가 삭제 결정을 내린 게시물에 대해 회원사들이 심의를 요청해 온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불응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조치의 배경에 대해 "방통심의위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정보'라는 심의기준에 따라 심의와 시정요구를 내리고 있지만 법적 근거가 불분명한 조치를 포털이 무조건 이행할 경우 이용자의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결정에는 현재 방통심의위의 시정요구를 놓고 법정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점도 고려됐다. 환경운동가인 최병성 목사는 올해 초 '쓰레기 시멘트' 게시글이 방통심의위 결정으로 포털에서 삭제되자 심의위의 결정은 사실상 강제력을 갖는 행정처분이며 이에 불복하니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방통심의위는 '권고 조치' 일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1심에서 방통심의위의 시정조치는 '행정처분'의 효력을 갖는다며 최 목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2심이 진행 중이다.

김 정책위원장은 "방통심의위의 시정요구가 강제성이 있는 행정처분이라면 포털들은 이를 반드시 따라야 하고 KISO도 이를 다시 심의할 수 없는 대신 이용자들은 소송을 통해 얼마든지 자신의 권리 제한에 대응할 수 있다"며 "그러나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포털이 방통심의위의 '사회적 유해성' 판단을 그대로 이행할 경우 정보 게시자는 소송 등 불복수단이 불가능해 권리를 제약받게 되기 때문에 KISO가 중간고리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때문에 KISO 정책위 결정에서도 회원사 요청시 방통심의위 조치에 대해 재심의를 하되 두 가지 단서조항을 달았다"며 "법에 명백히 규정된 불법정보나 청소년유해정보가 아닌 경우에만 재심의가 가능하고, 방통심의위 시정요구 성격과 관련한 법률적 판단이 종결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심의를 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통계자료가 없어 현 정부 들어 게시글 삭제 요청건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근 경찰에서 천안함 관련 게시글 삭제 요청이 상당히 많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라며 "삭제 요청 이유가 '허위사실이며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는데 어떤 것이 허위이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지 소명자료가 없어 모두 '해당 없음'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KISO 정책위는 최근 허위사실 관련 게시물 삭제 요청을 하면서도 요건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경우를 제한하기 위해 국가기관이 게시물 삭제를 요구할 경우에는 △ 반드시공문으로 보낼 것 △URL(인터넷 게시글 주소)를 특정할 것 △허위라는 근거를 제시할 것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게시했음을 소명할 것 등의 조건을 명문화 하기도 했다.

한편, 시민단체인 언론개혁시민연대는 1일 논평을 내어 이번 KISO 결정에 대해 '방통심의위 횡포에 제동을 건 진일보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언론연대는 "글을 삭제당한 게시자는 삭제 처분의 부당성을 다툴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박탈 당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사업자가 나서 이 같은 부당한 관행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며 "KISO의 이번 결정으로 뒤늦게나마 이용자 권리가 좀 더 보호받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고 밝혔다.

김창희 KISO 정책위원장은 1983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독일특파원, 뉴스플러스부 차장, 경영전략실 경영총괄팀장, 편집국 기획특집부장, 국제부장과 프레시안 편집국장 등을 지낸 언론인 출신으로 지난 2009년 3월 KISO 출범 때 정책위원장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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