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대통령과 수석비서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드라마 <웨스트윙>(NBC)은 일종의 거대한 판타지다. 미국인들에게는 리얼리티가 극도로 강조된 정치 드라마의 형식이 강했겠지만, 그것을 케이블이나 다운로드로 시청한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대한 드라마일 뿐이다. 그들은 적어도 드라마에선, 언론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대화와 설득, 타협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키며, 국가적 재난에서는 자신들의 책임과 잘못임을 강조하며 사과와 아울러 발 빠른 후속조치를 통해 일말의 의혹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다. 물론 그런 정치 환경을 시도한 대통령은 있었지만 현실화되지 못했고 정치는 다시 <웨스트윙>을 리얼 정치드라마가 아닌 (적어도 우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웨스트윙>이 가지는 리얼리티 정치 드라마의 범주를 사극이 대신해왔다. 얼마 전 종영한 MBC <선덕여왕>에서 볼 수 있듯 사극은 현대극이 너무 민감한 나머지 하지 못하는 현실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판과 비유, 풍자를 통해 많은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 이후 사극의 계보를 이어받은 MBC <동이>는 무수리에서 왕의 어머니로 신분상승을 일구어낸 영조의 어머니 최무수리 ‘동이’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에서 화제를 몰고 있는 캐릭터는 타이틀롤 ‘동이’가 아닌 ‘숙종’이다.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지진희)이 보여주는 모습은 기존 사극에 등장했던 왕들과 완전히 다르다. 근엄함은 간데없고 시청자들이 지어준 ‘허당 숙종’, ‘깨방정’, ‘깝종’(‘까분다’라는 뜻의 인터넷 속어 ‘깝치다’와 숙종의 조어)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장난기 가득하고 거침없이 말을 해대는가 하면 권위를 벗고 자유분방한 행동들을 일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종의 수업거부 중인 성균관 유생들과 지방 유림들이 ‘상경투쟁’을 벌이자 “빈손으로 올라오진 않았을 테고 진상품은?”이라 묻는가하면 그 질문에 다른 신하가 화들짝 놀라자 “농일세 이 사람아”라는 식으로 놀리는. 사극 대사로 말하자면 ‘체통’은 사대문 밖으로 던져버린 셈이다.

이런 해석이 색다르지는 않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전형성을 탈피하는 것은 가장 흔히 쓰이고 있는 변화 기법이니 말이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이 있기는 하겠지만, <러브 액츄얼리>에서 수상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의 ‘허당스러움’을 보여주기도 했고 우리나라 <굿모닝 프레지던트>나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도 친근한, 어설픈 대통령의 모습을 묘사한 적이 있다.

   
   
 
숙종의 캐릭터가 파격적인 이유는 가장 보수적인 조선사회, 유교에서 기인한 온갖 법도와 궁궐이라는 폐쇄적 공간 속에 등장하는 그 권력의 정점, ‘왕’이기 때문이다.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남성적 힘에 의존하는 군주의 모습이 아닌 유머와 지략, 정확한 상황 판단 등 현대적 리더십과 개인적 품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숙종의 모습은 현대적 가치에 의해 재창조된 리더의 롤 모델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욕망에 어느 매체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드라마 캐릭터의 속성상 숙종의 캐릭터는 단지 역사적 사실 비틀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숙종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모습의 키워드는 유머와 탈권위이다. 숙종이 드라마 속에서 궁궐 밖에 나가 동이 및 장악원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이나 그 속에서 주고받는 대화, 그리고 동이와 어린아이처럼 노는 모습들은 기존의 왕이 보여줬던 법도와 윤리라는 가부장적 질서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비교되며 보다 큰 효과를 가진다.

   
   
 
하지만 숙종 캐릭터가 흥미로운 것은 단지 파격을 보여줬다는 캐릭터의 극중에서의 묘사에 있다기 보다, 그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보여지는 방식에 있다. 여타 다른 드라마 캐릭터와 다르게, 숙종이라는 캐릭터는 과거사와 인물간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캐릭터 이해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숙종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드라마 속에서 숙종의 어린 시절이라든가 트라우마 같은 것들은 잘 드러나지 않았으며 모든 왕이 그렇듯 날 때부터 그냥 그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분 상승이라는 사극 최고의 ‘동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파격적이긴 하지만 그냥 그건 숙종의 ‘천성’일 뿐이지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것은 없(거나 혹은 빠져있)다. 그리고 동이나 장옥정이 어떤 상황에 던져지고 위기에 빠지는데 반해, 숙종은 해결사 혹은 조정자, 판관의 역할로 극의 흐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극적 흐름의 위에 존재한다. 이것은 내러티브 중심에 있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세팅된’ 캐릭터로서 숙종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숙종은 극중 캐릭터와의 관계, 극중 사건을 통해 성장하고 만들어지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현시대의 시청자들이 원하고 갈구하는 리더십에 기대 만들어진 측면이 그 어떤 캐릭터보다 강하다 할 수 있다. <웨스트윙>에서 언급한 판타지를 다시 갖고 온다면, 숙종이라는 권력 주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랬으면 하는 환상이 숙종에 열광하는 대중 심리의 핵심인 것이다. 드라마 속 캐릭터는 그걸 바라보는 대중들의 욕망을 통해 구성된다. 그 욕망은 작가에서 독자로 이어지는 정방향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동이>에서의 숙종은 유머가 상실되고 다시금 권력자로서의, 법도의 권위만이 강조되는 사회를 살고 있는 대중들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다. 숙종의 소탈함과 탈권위, 유머를 보고 작년에 세상을 뜬 한사람이 생각나는 게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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