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렬의 손이 1㎝만 더 길었더라면.’

마치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만 더 높았더라면’하는 식의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선동렬(47)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현역이었던 시절에 야구 판에서는 한 때 그런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선동렬의 손가락이 길었더라면, 가뜩이나 위력적인 그의 공이 다양한 구종으로 인해 더 치기 어려웠을 거라는 얘기였다.

선동렬은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 구단으로 이적한 직후인 1996년 3월에 펴낸 자전 에세이 <정면으로 승부한다(샘터사)>는 책에서 이런 글을 실어놓았다.

‘내 몸에 불만인 부분도 없지 않은데 그중 가장 큰 불만은 유난히 짧은 손가락이다. 일반인에 비해서도 짧은 편이니 내 체구와 비교하면 가히 그 불균형의 정도가 심각할만하다. 손끝에서 중지까지의 최고 길이가 18㎝, 손가락만 따지면 중지가 7.7㎝, 검지는 7㎝다. 투수는 손가락이 길수록 유리한 법인데. 한 때 기자들의 요청에 의해 한국 프로투수 중 손가락이 가장 길다는 한화의 정민철(은퇴)과 비교해 보았다. 무려 5㎝나 차이가 났다. 그의 중지는 10㎝였고, 손목에서 중지까지는 23㎝였다. 내가 포크볼을 못 던지는 것은 이처럼 손가락이 짧기 때문이다.’

   
  ⓒOSEN  
 
신체(손)의 불리함을 딛고 선동렬 감독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은 타고난 몸의 유연성과 힘, 영리한 머리, 부단한 노력, 뭐 이런 것들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4월29일, 잠실구장에서 만난 선동렬 감독과 지난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일본 주니치 구단에 가게 된 뒷얘기, 비화 아닌 비화를 듣게 됐다. 선동렬 감독이 주니치 구단과 최초로 비밀 접촉한 것은 1993년 시즌 도중이었다. 당시 주니치 구단 관계자가 극비리에 방한, 광주로 내려가 선동렬 감독과 만나 의사를 타진했다는 사실을 <일간스포츠>가 특종 보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선 감독은 당시의 직접 접촉 사실에 대해선 부인했다. 그 보도가 나간 후 한 신문은 ‘매국노’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선동렬의 일본 진출 움직임 자체를 극렬히 비난했다. 마치 도굴범이 국보급 유물을 일본에 밀반출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투였다.

선 감독은 "어찌됐던 내가 1호로 일본에 진출함으로 인해 FA(자유계약)제도 생기게 됐다"고 선구자로서의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1995년 말 선동렬의 일본 이적 문제를 놓고 해태 타이거즈 구단은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 이제는 우리도 선동렬 같은 선수를 해외에 내보내 이를테면 국위선양도 하고 도대체 우리 프로야구의 실력과 위상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여론도 있었다. 여론의 등쌀과 당사자인 선동렬의 완강한 일본 진출 의사를 꺾지 못한 해태 구단은 결국 여론조사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 결과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문제는 일본 구단 가운데 애초에 영입의사를 밝힌 주니치 구단 외에 일본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가 스카우트 전선에 뛰어들어 사태가 복잡하게 얽히고 꼬였다는 점이다. 우여곡절 끝에 박건배 당시 해태 구단주가 주니치 쪽으로 최종 정리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구단주의 의사를 거슬러 요미우리 임대를 추진했던 사장과 단장이 한꺼번에 옷을 벗는 후폭풍도 일었다. 주니치구단 측에서 자매결연 관계인 LG 트윈스 구본무 당시 구단주에게 협조 요청을 했고, 구본무 구단주와 특수 관계였던 박건배 구단주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게 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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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렬은 그와 관련, "과정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누가 뭐래도 최종 선택은 내가 한 것이다. 당사자가 안 가겠다고 하면 어쩌겠느냐. 주니치는 분명 내가 선택했다. 그 선택은 '엄청' 잘 한 것이었다. 요미우리에 간 것보다 주니치로 간 것이 잘 됐다"고 강조했다. 선 감독은 주니치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주니치는 고향 팀 같은 구단이었다. 나고야에선 택시를 타도 요금을 받지 않았다. 마치 광주 같은 분위기였다"는 예화로 설명했다.

"그 때 요미우리는 나가시마가 감독이었는데, 만약 내가 요미우리로 가서 첫 해 부진했다면, 물론 잘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요미우리는 잘 하는 선수만 쓰는 구단이다. 이승엽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반면 주니치 호시노 감독은 첫 해 부진에도 불구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줬다. 호시노 감독이 투수 출신이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요미우리에서 실패했다면 나를 키워줬겠느냐."

얘기는 자연스레 이승엽(34.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로 흘렀다.

선동렬 감독은 "올해로 계약이 끝나는 이승엽이 (내년에도 일본에 남아 있겠다면 퍼시픽리그로 가) 연봉을 최대한 낮추고(선 감독은 수 천만 엔으로 표현했다. 이승엽의 올해 연봉은 6억 엔으로 일본 무대 최고액 선수이다) 인센티브 계약을 맺는다면 (계속 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피력했다.

"요미우리가 남 주기는 아깝고 다른 애들(다카하시나 가메이 같은 이승엽과 1루수 자리를 경쟁하는 선수들을 지칭)이 안 맞으니 기회를 주기는 하는데…."

선 감독이 이승엽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한 셈이다.
 

 ※홍윤표 야구전문 칼럼니스트는  일간스포츠, 한국일보 야구 전문기자를 거쳐 현재 인터넷스포츠 매체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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