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둘 때 연전연패를 거듭하면 자신감을 잃어 한 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냉철한 수읽기로 상대를 압박하기는 커녕 상대가 두는 수를 뒤따라가기도 바쁘다. 중원을 잃고, 변도 잃고, 아슬아슬 대마까지 잡히면 바둑 둘 맛이 안 난다.

진보·개혁 진영은 전국단위 선거에서 번번이 쓴맛을 봤다.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통령선거,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한나라당의 거센 바람에 맥을 추지 못했다.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은 지방선거를 90일 정도 남긴 가운데 한나라당 우위의 여론조사 결과를 연일 발표한다. 진보·개혁진영은 이번 선거에서도 예전처럼 대마를 잡히고, 중원 잃고, 변과 귀까지 잃는 ‘형편없는 바둑’을 두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수도 있다.

2% 부족한 민주주의 위기 심판론

패배의 원인은 국민의 정치무관심도, 배금주의에 사로잡힌 이기심도 아닌 진보·개혁 진영 바로 자신의 패배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이 종합부동산세를 무력화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줄 때 고급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부동산이 재산이 많은 주민들은) 환호하고, 표를 몰아줬다. 야권은 쓰린 속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야권은 민주주의 위기를 공론화했고, 이명박 정부 심판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2% 부족한 느낌이다. 국민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주장일 수는 있지만, 내 자신의 문제라고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전국을 강타했던 이유는 나의 문제, 내 자식의 문제, 내 부모의 문제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부자들에게 확실하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진보개혁 성향 정당이 집권하면 서민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게 현실이다.

무상급식, 진보개혁진영 패배의식 떨칠 묘수되나

   
  ▲ 경기도교육청이 이달부터 도서벽지와 농어촌 읍면지역 전체 초등학생에 대한 무상급식을 실시함에 따라 4일 오전 경기도 광주 오포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무료로 점심을 먹고 있다. 이날 오포초등학교에는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방문, 배식을 한 후 어린이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연합뉴스  
 
최근 전국단위 선거의 연전연패도 그 원인 중 하나이다. 잔뜩 주눅이 들어 움츠려 있던 진보·개혁 진영이 현 집권세력을 한방에 보낼 수도 있는 ‘묘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죽은 것 같았던 대마를 살리고 중원을 회복할 수 있는 이 묘수는 바로 ‘무상급식’ 이슈이다.

무상급식을 학생들의 ‘공짜 밥’ 정도로 여긴다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것과 같다. 보수신문들이 무상급식 이슈가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를 살필 필요가 있다.

동아일보는 지난 2월19일자 31면 <‘100% 무상급식’ 민주당 공약, 오히려 반서민>이라는 사설에서 “부담 능력이 충분한 계층의 자녀에게까지 공짜 점심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야말로 서민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보수신문, 무상급식 '포퓰리즘 규정

   
  ▲ 중앙일보 2월18일자 34면.  
 
이철호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2월18일자 34면 <포퓰리즘 유령이 어른거린다>라는 칼럼에서 “지지율이 뒤처지는 후보일수록 기를 쓰고 이 공약(무상급식)에 매달리는 것도 꺼림칙하다”고 지적했다.

이신우 문화일보 논설위원은 2월12일자 38면 칼럼에서 “중산층은 물론 부유층 자녀들에게까지 무상 급식을 공약하는 것은 누가 봐도 꿍꿍이가 있음을 눈치를 채게 할 뿐이다.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과 무책임한 대중 간의 야합이 진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채 전염병처럼 사회 전반으로 번져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한 언론 논리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이러한 논리는 허점투성이다. 동아일보는 부담 능력이 충분한 자녀까지 무상급식을 하는 것은 문제 있다는 논리를 폈는데 그렇다면 초등학교 무상교육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무상급식 예산이 문제라고?

   
  ▲ 문화일보 3월5일자 사설.  
 
또 부담 능력 있는 자녀들에게만 급식비용을 받는다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정서적인 상처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렇게 될 경우 무상급식을 받는 아이들은 가난한 아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겠는가.

보수신문이 무상급식에 부정적인 대표적인 근거로 내세우는 게 예산 문제이다. 문화일보는 3월5일자 <6.2 지방선거, 포퓰리즘 공약 경계해야>라는 사설에서 “재원 조달이나 실현 가능성을 치밀하게 따져보지 않고 일단 유권자들의 눈길부터 끌고 보자나는 포퓰리즘 공약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후유증까지 사실상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2조~3조원이 들어가는 초·중등생 무상급식 공약이 대표적”이라고 주장했다.

보수신문의 예산 우려는 ‘양날의 칼’이다. 정말 예산이 부족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예산이 부족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수십 조원을 강물에 쏟아 붓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는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물에 쏟아 붓는 수십조 예산은

야권은 한목소리로 무상급식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초·중등생에게 전면 무상급식을 하면 추가적으로 매년 2조원 안팎의 예산이 들어간다고 한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 같지만 4대강에 쏟아 붓는 예산을 줄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치이다.

이는 4대강 사업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 무상급식을 도입할 것인가의 물음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이명박 정부를 상징하는 국책사업의 실정을 정조준하는 이슈가 바로 ‘무상급식’이다.

무상급식은 연전연패로 잔뜩 주눅이 든 진보·개혁 진영의 활로가 될 수 있다. 진보·개혁 진영의 정책이 서민 중산층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 지방선거 쟁점되면 MB정부에 재앙

   
  ▲ 한겨레 3월5일자 30면.  
 
무상급식 이슈는 헌법 제31조 3항에 보장된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를 실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겨레 5일자 30면 <무상급식을 찍고 첼로까지>라는 칼럼에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무상급식 정책도 단지 공짜 밥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이 정책의 요체는 헌법 제31조가 규정하는 ‘무상 의무교육’을 온전히 실현하자는 것,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여 이들의 실질소득을 올리자는 것, 저소득층 학생이 어릴 때부터 자기모멸감을 느끼는 것을 막고 사회통합을 강좌하자는 것이다.…예산이 없다는 주장에도 솔직함과 진정성이 없다. 서울시의 경우 오세훈 시장의 역점사업인 ‘디자인 서울’이나 ‘한강 르네상스’ 등에 4년간 7조원 가량이 들어갔다.”

무상급식이 쟁점으로 떠오르면 지방선거는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후보와 반대하는 후보로 나눠진다. 보수신문이 ‘포퓰리즘’이라면서 방어막을 치기는 하겠지만 국민이 무상급식에 손을 들어준다면 ‘부자감세’의 시대는 가고 ‘보편적 복지’의 시대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4대강 사업의 허상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두려움이자 재앙의 결과로 다가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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