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필자는 2009년 12월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회원들과 함께 보름간 팔레스타인(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다녀왔다. 수도 라말라를 비롯해서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블루스, 헤브론 등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관할 구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돌아올 때는 이스라엘 영토 안의 하이파를 거치는 여정이었다. 이 글이 초점을 맞추는 헤브론은 이스라엘 점령하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필자의 다른 기행문([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도 참고하시기 바란다.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도 라말라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다. 체크포인트를 두 군데 거치는데, 총을 든 채 여권을 훑어보는 이스라엘 병사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미안해. 나도 짜증나거든? 입을 꾹 다문 채 그렇게 대꾸했다.

2009년 1월 가자 지구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지만, 내가 서안 지구에 머무는 동안에 특별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들은 바로는, 겨우(?) 한 명만 죽었을 뿐이라니까.

매력적인 구시가에서 사건에 대해 들었다. 자동차를 타고 H1구역으로 들어오던 이스라엘 정착민이 좁은 골목에서 강도를 만났다. 손에 칼을 들고서 차를 가로막았다는 것.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정착민은 자동차를 그대로 전진시킬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가 그의 주장이다. 강도라고? 얘기를 해주는 팔레스타인인 안내자가 허전하게 웃었다. 아직 앳된 얼굴의 청소년인데? 더구나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칼이 아니라 콜라병이었는데? 만에 하나, 그 애가 강도라고 하자. 그렇더라도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자동차는 그 애를 깔아뭉갠 뒤 후진한다. 그 다음 다시 전진. 그렇게 서너 차례 후진과 전진을 반복한 다음 사라졌다.

 

   
  ▲ 그림1- 2007년 제닌에서 살해당한 17세 소녀 부시라 바르기스. 피에 젖은 문법공책이 사건을 증명한다. (http://www.inminds.co.uk/article1.php?id=10133)  
 
나는 감히 진실에 대해 말할 능력이 없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매파들이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노암 촘스키의 책을 인용해서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 밝혀 보자고 제안할 처지도 아니다. 그의 책에서는 학교에서 시험 준비를 하던 여학생을 이스라엘 정착민이 총을 쏴 죽여도 (그림 1) 단지 놀라게 할 목적이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무장한 정착민을 향해 돌을 던진 아이들의 팔을 감나무 가지처럼 뚝뚝 아주 쉽게 부러뜨리고, 좀 더 심한 혐의가 있으면, 혹은 그날따라 기분이 꿀꿀하면, 네 발로 기면서 개처럼 짖도록 하거나, 베긴과 국경경비대를 찬양하도록 윽박지르거나, 혹은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의 뺨을 때리도록 하는 따위의 보복이 거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제시된다. (노암 촘스키 지음, 최재훈 옮김, 숙명의 트라이앵글, 이후, 2008.)

 

물론 나는 그런 광경들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내 눈으로 직접 헤브론의 구시가를 보고 난 뒤였다. 이것은 내가 더 이상 편파적이라는 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하이파 대학의 교수였던 역사학자 일란 파페는 자신의 저서 『팔레스타인 현대사』에서, "요컨대, 이 책은 주관적인 접근을 전제하며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승자보다는 패자를 대변한다."고 미리 밝힌다.(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현대사, 후마니타스, 2009.) 이런 입장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극우파들로부터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끝내 영국으로 건너가고 만다. 

4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헤브론은, 특히 구시가는 승자와 패자가 어떤 식의 삶을 꾸려 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장에는 1829개의 상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군의 명령에 따라 512개 상점이 강제로 문을 닫았다. 2000년부터는 물리적 봉쇄로 인해 훨씬 많은 수의 상점들이 어쩔 수 없이 폐업을 하게 되는바, 그 수는 1141개로 전체의 76.5%에 달한다. 물론 시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좁은 길을 따라 양쪽으로 가게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통로에도 노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길을 걷기 힘들 정도다. 라말라나 나블루스 시장처럼 그곳 역시 인파와 활력이 넘친다. 공산품은 대개 중국산이지만, 가루우유와 같은 유엔(UNRWA)이 제공한 구호품도 버젓이 진열대 위에 올라와 있다. 사람들은 우리 일행이 셔터를 눌러댈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해 준다.

오, 치나(중국). 오, 야판(일본). 섭섭해도 어쩔 수 없다. 헤브론의 자동차들 중 반 이상이 '휸다이'(현대)라고 해도 말이다. 어느 순간,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키리코의 그림에나 나옴직한 낯선 풍경이 걸음을 막는다. 텅 빈 상점들의 거리! 바야흐로 봉쇄와 점령이 실체화되는 지점이다. 물리적 봉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콘크리트 가설물은 물론이고, 철문과 철조망 따위가 두루 이용된다. 문 닫은 상점들 위로 마치 햇볕을 가리는 차일처럼 그물이 쳐져 있다.

 

   
  ▲ 그림2- 헤브론 시장의 그물망. (사진 이안, 2009)  
 
거기에 온갖 잡동사니가 떨어져 있다. 병, 구두, 쓰레기, 깨진 화분, 심지어 벽돌이나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까지.(그림 2) 상점 이층 이상은 가정집들이다. 창문 바깥에 예쁜 화분을 내놓은 집도 보인다. 안내자는 쉽게 믿기 어려운 말을 보탠다. 이층을 점령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골목길을 지나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겨냥해서 그렇게 해코지를 한다고 했다. 그물은 '자위'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쳐놓은 것이라는 설명.

 

어안이 벙벙해서 차마 더 묻지도 못하는데, 안내자가 손으로 어느 옥상을 가리킨다. 언뜻 카키색 군복이 보인다. 이스라엘 병사다.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들 때문에 철벽같은 보루 밖으로 몸을 드러낸 것이다. 시장 주변에 그런 망루 겸 초소들이 숱하다. 정착민이 5백 명 남짓인데, 주둔군은 천 5백 명 이상이다.

1948년 나크바(대재앙), 혹은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 헤브론에 유대인들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68년으로, 그때는 동쪽 외곽에 따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1979년에 일부 유대인들이 시장 안 한 빌딩을 강제로 점령했고, 1983년에는 야채상 거리와 초등학교, 그리고 버스터미널까지 점령했다. 정착민 한 명이 '적의 심장' 한복판에다 이스라엘 국기를 꽂고 버티면, 이스라엘군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분대 병력 이상을 파견한다. 나아가 보안상 이유를 내걸어 정착민이 '입주'한 건물 아래층 상점을 폐쇄하고, 좌우 옆집 주민들까지 강제로 내쫒는다.

그렇게 해서 헤브론 구시가 안에 기묘한 형태의 '이스라엘 영토'들이 생겨난 것이다. 서안지구 곳곳에 들어선 유대인 정착촌을 흔히 구멍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로 비유하는데, 헤브론의 '치즈'는 해도 해도 너무하다. 차라리 뿅망치로 때려도 뿅뿅 자꾸 고개를 내미는 두더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뿅망치조차 없지만! 두더지 굴들을 헤브론 외곽의 정착촌과 연결하여 폭 6미터에서 12미터에 이르는 도로까지 냈다. 그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상점들이 문을 닫은 것은 물론, 길을 갈 때도 시험문제 풀듯이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

 

   
  ▲ 그림3- 길 가운데에 있는 검문소. 헤브론 구시가 내에만 110개의 검문소가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선 오른쪽으로만 다녀야 한다. (사진 염창근, 2009)  
 
어떤 길은 걸어서만 어떤 길은 차로써만 통행이 가능하고, 또 어떤 길은 아예 통행금지이기 때문이다. (그림 3) 용접해서 대문을 막아 버린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 경우, 애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창문을 통해 도둑처럼 들락거려야 한다. 이웃집 지붕을 아슬아슬 타고 넘어야만 자기 집에 갈 수 있는 사람들보다는 행복한 경우다. 난데없이 물벼락에 돌팔매질을 당하고, 시도 때도 없이 검문검색이다.

 

 

   
  ▲ 그림4- 이스라엘 모자. (http://www.inminds.co.uk/enough.occupation.9.june.2007.php)  
 
초등학생들까지 옷 속에 무어 '자살폭탄'이라도 숨겼을지 모른다며 뒤짐을 당한다. 자료용 비디오에는 이스라엘 정착민 모자가 검은 차도르 차림의 팔레스타인 할머니를 공격하는 엽기적인 장면도 있다. 엄마는 할머니의 하얀 히잡을 벗겨내려 하고, 초등학생 아들은 아예 하이킥을 날린다. (그림 4) 대책은 없는가. 다행히 유럽 각국에서 건너 온 비정부기구 자원활동가들 CPT: Christian Peacemaker teams (http://www.cpt.org/), EAPPI: Ecumenical Accompaniment Programme in Palestine and Israel (http://www.eappi.org/), TIPH: Temporary International Presence in the City of Hebron (http://www.tiph.org/) 등. 2002년에는 스위스와 터키 출신 두 명의 자원활동가가 이스라엘군의 발포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 아이들의 안전한 등굣길을 위해 매일같이 손을 잡고 통학을 한다. 그래도 위험은 상존한다. 헤브론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급'이 다른 자들이었다.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는 성지라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빼앗아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더러는 그런 종교적 신념과도 상관없는 '미치광이들'이다.

 

   
  ▲ 그림5- 학살자 바룩 골드슈타인. (http://www.kawther.info/wpr/2009/09/17/the-execution-of-a-palestinian-journalist)  
 
이스라엘 병사들의 삼엄한 검색을 받은 후 '예언자 아브라함'을 모신 이브라히미 모스크에 들어가는데, 1994년 2월 25일 그곳에 난입해서 기관총을 난사, 예배자 스물아홉 명을 학살한 미치광이 의사 바룩 골드슈타인이 절로 떠오른다.(그림 5) 사건 이후 이스라엘측이 내놓은 대책이 있다. 모스크를 아예 둘로 쪼개서, 한쪽을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로 만들어버린 게 그것. 어떤 화가가 그림에 팔레스타인 국기에 들어간 색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6개월 형을 선고받은 일도 있으니까. (노암 촘스키, 앞의 책, 912쪽. 팔레스타인 국기에 쓰인 색은 검정색, 흰색, 빨강색, 녹색이다).

 

아브라함의 묘를 반씩 나눈 것은 차라리 공평한 처분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세상에!
  
희망은 없을까. 천만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희망은 곧 기억하는 일이다. 예를들어 1996년 창립된 헤브론 복원위원회(Hebron Rehabilitation Committee)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구시가를 복원하는 일에 전력하고 있다. 

신화와 전설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하고, 예부터 선조들이 간직해 온 꿈과 서사를 기억하고, 돌 하나, 풀 한 포기, 구름 한 점마다 깃든 슬픔을 기억하고, 올리브나무 가지와 잎에 새긴 사랑의 약속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오.   신분증 번호는 50000번,   자식은 여덟 명.   아홉 번째 자식은 올 여름에 태어날 거요.   왜 무어가 잘못됐소?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오.   직업이야 채석장에서 친구들과 죽어라 노동일하는 것.   여덟 명 자식들 빵을 먹이고   옷을 사 입히고 책을 보게 하자면   열심히 바위를 깨야 하요.   댁의 집 앞에서 구걸을 하거나   굽신거리지는 않을 테니 염려 놓으시오.   왜 무엇 화나는 것이라도 있소?   (중략)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오.   당신들은 내가 경작해 왔고   내 선조들의 것이었던 포도밭을 빼앗았소.   나와 내 자식들   그리고 앞으로의 내 후손 아이들에게   당신들은 이 채석장의 바위 밖에는 남겨주지 않고 있소.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당신네 정부는 이 바위들마저 빼앗아 가리라 한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자아, 그건 그렇고   기록 명부 맨 위에 적어 놓을 게 하나 있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훔칠 마음도 전혀 없지만   그러나 정 배가 고파지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억압자의 살덩이를 깨물게 되니   내가 느끼는 기아, 그리고 분노를   부디 명심하도록 하시오.  (마흐무드 다르위시, [신분증]에서)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