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국가 오세아니아에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가 가정에 보급돼 있다. TV처럼 생긴 이 장치는 방송을 송출해주면서 반대로 기계 밖의 화면과 작은 소리까지 국가기관으로 전송해 주민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빅브라더는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포스터로 도배된 길거리나 숲속까지 마이크로폰이 숨겨져 있어 허튼 소리라도 하는 날엔 소리 소문 없이 잡혀간다. 아이들은 부모의 잠꼬대까지 감시하도록 훈련돼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다.

스마트폰·인터넷 감청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
기술발전 쫓아가지 못하는 법체계 보완 시급

“빅브라더의 시대가 아니라 빅브라우저의 시대다.”

지난 1일 우윤근 박영선 변재일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개최한 ‘패킷감청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한 토론회’에서 임종인 고려대 교수(정보경영공학전문대학원)는 2010년 현재를 이렇게 표현했다. 과거에는 전화나 우편물에 대한 도청·감청이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컴퓨터에 저장된 데이터는 물론 방문한 인터넷 사이트 접속기록과 이메일, 메신저 대화 등 모든 정보를 국가기관이나 민간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수집하거나 감시할 수 있는 기술이 일반화됐음을 날카롭게 풍자한 것이다.

이날 토론회 시작 전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인터넷 패킷감청 시연은 기술발전에 따른 감청이 어느 영역까지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사용자 A씨가 컴퓨터에서 보낸 데이터를 회선 중간에서 제3자가 패킷을 가로채 감청을 한다는 설정으로 이뤄진 이 실험에서  A씨가 이메일을 열자 그 내용이 전부 감청을 하는 상대 컴퓨터 화면에 그대로 나타났다. 패킷감청은 메신저 내용까지 실시간 감청이 가능했으며, 일부 사이트에서는 ID와 비밀번호까지 노출됐다.

   
  ▲ 통일 독일 이전 동독 비밀경찰의 도청·감청을 조명한 영화 '타인의 삶'의 한 장면. 주요 인사들에 대한 도청은 상시적으로 이뤄졌으며 반체제 인사로 분류된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감금, 고문당했다.  
 

어려운 기술이 사용된 것도 아니다. 진보네트워크 관계자는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와이어샤크’라는 해킹프로그램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현행법에서도 수사상의 목적으로 영장을 발부받아 KT나 SK브로드밴드, LG텔레콤 등 인터넷망 사업자나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과 같은 포털사이트 사업자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데 패킷감청까지 아무런 제한 없이 허용된다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넓은 감청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 때문에 패킷감청과 같은 새로운 감청방식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어 제약에 한계가 있고 우회적인 편법감청이 가능해 견제장치 또한 미약한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해야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국정원과 검찰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건이 대표적이다. 범민련의 이경원 사무처장은 2003년부터 2009년까지 7년에 걸쳐 상시적인 감시(도청과 감청)를 받아왔으며, 최근 2년6개월 동안에는 무려 14차례에 걸쳐 통신제한조치가 연장된 사실이 밝혀져 인권침해 논란이 벌어졌다. 그는 기소 뒤에서야 자신이 감청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해 9월 국보법 위반으로 기소된 곽동기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도 국정원의 패킷감청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정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패킷감청장비는 30여 대가 넘는다.

수사기관의 통신감청 건도 최근 2년 증가추세에 있다. 2009년도 상반기 통신사업자들이 수사기관에 협조한 감청건수는 799건으로 전년도 동기대비 608건에 비해 31.4%나 늘었다. 통신수단별로 보면 유선전화 21.4%, 이동전화 23.2%, 인터넷이 25.3%가 증가했다. 반면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법원의 영장기각률은 3% 미만이었다.

   
  ▲ 한나라당 이한성 의원이 발의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과 관련해 미디어행동,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10여 개 단체가 지난해 4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휴대전화 감청을 허용하는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민에 대한 전체주의적 감시통제가 심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최근 국회에서 아직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통비법 개정을 서두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수사기관의 감청은 범죄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점도 있지만 통제를 받지 않고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감청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나라당 이한성, 이정현 의원 등은 휴대전화 감청과 패킷감청의 범위를 한정하는 개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그러나 참여연대와 진보네트워크 등 시민단체와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 야당들은 패킷감청의 범위를 법률로 정하면 오히려 감청을 합법화 시켜주는 역효과가 난다며 아예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지난달 28일 감청에 대한 영장주의 예외를 삭제해 항상 법원의 통제를 받게 하고 감청기간도 무제한 연기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제한하는 통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패킷감청 관련 국회 토론회를 개최한 박영선 우윤근 변재일 의원 등도 조만간 의견을 모아 개정안을 발의, 2월 국회에서 논의한다는 방침이다.

법률전문가들은 패킷감청 부분은 지금까지 국회에서 해 온 것처럼 타협으로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오동석 아주대 교수(법학대학원)는 “패킷감청은 헌법적으로 절대 허용될 수 없는 절대금지의 영역”이라며 “패킷감청 금지는 그나마 개인의 통신자유와  인권을 보호하는  숨통을 터놓는 조치”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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