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한명숙 의혹’ 보도, ‘박연차 사건’ 보도 닮은꼴

12월9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200일 되는 날이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유의 사건은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검찰의 ‘언론 플레이’와 언론의 ‘인격살인’ 보도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도 거셌다. 언론 내부의 자성 목소리도 나왔지만, 언론 반성은 다시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있다.                                -편집자

정치인 부패의혹 보도가 당사자에게 정치적 치명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언론의 공신력 때문이다. 언론이 누군가의 실명을 적시하면 언론 수용자들은 보도에 나온 의혹을 ‘절반은 진실’로 믿게 마련이다.

언론이 근거도 없이 특정인 실명을 거론했겠느냐는 일반의 인식은 부패의혹 보도의 영향력을 높이는 요인이다. 정치인 부패의혹 보도는 치명적인 약점도 안고 있다. 언론 보도의 사실 관계가 틀렸거나 사실 관계가 불분명할 경우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 7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합정동 ‘노무현재단’에서 조선일보의 한명숙 전 국무총리 보도를 둘러싼 비상대책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치열 기자  
 
지난 5월 전직 대통령 서거로 이어진 ‘박연차 사건’ 보도를 둘러싼 논란이 2009년 12월 재연되고 있다. 조선일보의 한명숙 전 국무총리 의혹 기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00일을 맞은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조선은 지난 4일자 1면에 <“한명숙 전 총리에 수만불”>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 2부가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2007년 무렵 수만 달러를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해 대가성 여부를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이다.

조선이 ‘한명숙’이라는 실명을 보도한 기사 내용은 여의도 주변 정보지에 떠돌던 얘기로 참여정부 실세였던 J, K, H씨가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다. 언론에 처음 나온 기사도 아니다. 한국일보는 지난 11월13일자 1면에 <“참여정부 실세 3명에 금품 줬다”>는 기사가 실렸다. 검찰이 사실 관계 확인을 해주지 않아 언론도 애를 먹었고, 여론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던 사건이다.

조선일보 보도는 정보지 떠돌던 얘기

조선 보도 내용은 한국일보 보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큰 차이점은 H씨 실명을 ‘한명숙’으로 적시해 보도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가 실명 보도에 나선 배경에는 검찰 담당 수사관 또는 그 윗선에서 ‘한명숙’이라는 이름을 확인해 줬을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일단 “진술이라고 할 만한 단계가 아닌데 보도가 나갔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언론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합뉴스는 지난 4일 “검찰은 곽씨의 진술에서 액수, 시기 등이 특정되지 않았고 일부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앞뒤가 맞지 않아 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보강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해당 수사를 맡고 있는 중앙지검 특수2부 관계자나 수사내용을 속속 들여다보고 있는 직속 검찰수뇌부, 또는 검찰보고를 받는 고위 정부관계자 중 어느 곳에서 아직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정보를 조선에 건네줬고 △조선은 정보원 직책으로 미뤄 신뢰성이 높다고 판단, 당사자 해명도 듣지도 않은 상황에서 실명을 적시해 기사화했으며 △다른 언론은 조선일보가 실명을 썼으니 법적 책임에서 안전하다고 판단, 뒤따라 후속보도들을 쏟아냈고 △상황이 언론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자 검찰은 ‘확인 안 된 내용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갔다’며 발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진행상황은 놀랍게도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때와 똑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대로 된 수사를 받기도 전에 언론을 통해 미확인 된 사실이 보도되고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여론재판이 이뤄지면서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검찰은 당시 수사내용을 언론에 흘리는 이른바 ‘빨대’를 찾아내 징계하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법무부 “검찰은 언론에 언급한 바 없다”

법무부는 이번에도 검찰은 보도와 무관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지난 7일 국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에서는 수사진행 상황이나 혐의 내용에 대해 전혀 언론에 언급한 바 없다”고 해명했다. 이귀남 장관은 곽영욱 전 사장 변호인이나 참고인 쪽에서 얘기가 나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한 전 총리 쪽 시각은 전혀 달랐다. 조선일보가 4일자 지면을 통해 한 전 총리 의혹을 제기한 당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노무현 재단’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참여정부 핵심인사들이 모여 정면 대응을 공언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검찰과 조선일보의 행태를 ‘정치 공작’이라고 규정했고,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패륜적인 행위’라고 규정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등 범야권도 이번 사건을 엄중한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당 의원 43명은 6일 성명을 낸 데 이어 7일 의원 일동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한명숙 상임고문에 대한 불미스러운 언론보도는 검찰의 수사기밀 누설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명백한 피의사실 공표”라며 “언론에 요청한다. 확인되지 않은 피의사실에 대한 무책임한 언론보도는 돌이킬 수 없는 인격살인”이라고 경고했다.

한 전 총리도 7일 노무현 재단에서 “언론에 보도된 내용, 진실이 아니다. 단돈 1원도 받은 일이 없다. 저는 결백하다”면서 “국민 여러분께서도 한명숙의 진실을 믿으시고 안심하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명숙 “단돈 1원도 받은 일이 없다”

조선 보도가 나온 이후 ‘언론 공작’ ‘정치 공작’ ‘패륜적인 행위’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조선은 자신의 보도를 입증할 후속보도를 내놓아야 ‘무책임한 보도’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4일자 1면 기사 이후에 이렇다 할 후속보도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조선은 신문 주목도가 어느 때보다 높은 월요일(7일자) 지면에 한 전 총리 관련 후속 보도를 내놓지 못했다. 8일자 지면에는 10면 <‘대한통운 비자금’ 청와대 전 인사비서관 소환>이라는 기사에 한 전 총리를 언급하는 수준이다.

조선일보가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마땅한 팩트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궁금한 대목이다. 이번 사건은 검찰의 언론플레이, 언론의 무책임 보도 등 검찰발 뉴스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 전 총리와 함께 야권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 중 하나인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7일 대표단 회의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검찰의 잘못된 수사 관행이 아직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 개탄스럽다. 검찰은 이 문제에 대해 언론을 동원한 여론몰이를 중단하고, 무책임한 행태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류정민·김상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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