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1일 도쿄지법 301호 법정. 요시노 분로쿠(吉野文六) 전 외무성 미국 국장이 법정에 섰다. 증인출두는 1972년에 이어 두 번째. 요시노 씨는 오키나와 반환 교섭 때 미국과 밀약이 있었다며 “(공문서의 BY 이니셜은) 내가 담당국 실장으로 사인했다”고 증언했다.

‘니시야마 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열도를 뒤흔든 대특종이 37년 만에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니시야마 타키라(西山太) 전 마이니치 기자(78)의 얼굴에 회환의 웃음이 감돌았다.

사건은 1971년 외무성 출입기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니시야마 씨는 마이니치신문이 자랑하는 특종기자였다. 재직 15년 동안 100건 이상의 특종으로 1면을 장식한 민완기자로 이름을 날렸고 편집국장, 사장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키나와 반환교섭을 취재하던 중 1971년 6월 ‘오키나와 반환 협정’ 체결과정에서 미국이 지불해야 하는 미군 기지의 토지원상 회복비용 400만 달러를 포함 2000만 달러(당시금액)의 비용을 일본이 대신 지불한다는 밀약이 맺어졌다는 극비문서를 외무성 여성 사무관으로부터 입수, 이를 기사화 했다. 그러나 그 후 사회당 의원이 극비문서를 제시하면서 자민당을 몰아세운 것을 발단으로, 외무성이 정보원 색출에 들어간 결과 취재원과 기자가 국가공무원법 비밀 준수의무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사토에사쿠(佐藤榮作)수상은 오키나와 반환을 성사시킨 공로로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알권리를 주장하면서 대정부 비판을 시도했지만 검찰이 기소장에 ‘여성사무관을 호텔로 불러서 정을 통하고 이를 이용해서’라는 표현을 사용, 해당 보도가 남녀관계를 이용한 취재였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사태가 반전됐다. ‘저널리즘 대 국가’라는 본질은 어느 순간 ‘섹스스캔들’로 변질됐고 정보수집 방법에 초점을 맞춘 스캔들 보도가 지면과 뉴스시간을 채우게 되었다. 마이니치는 여론의 질타는 물론 동종 언론사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출입처의 동료기자들도 특종의 본질에 대해서 눈을 감았다. 니시야마씨의 저널리즘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여론의 비난에 굴복, 마이니치는 결국 밀약보도를 단념했고 니시야마 기자는 1974년 천직으로 여겼던 기자직을 떠나게 됐다. 얄궂게도 일 년 후 마이니치는 경영악화로 인해 ‘회사경생법’을 신청했다. 경영악화의 배경에는 ‘니시야마 사건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정설이다.

취재방법의 위법성과 보도의 자유에 대한 논의는 해당 국가의 언론문화에 따라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

   
  ▲ 이홍천 일본 추오대 겸임강사  
 
러나 국가와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의 감시기능을 생각한다면, 사안에 따라서는 법적인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사명감이 요구된다. 특종은 2005년 5월 밀약을 증명하는 문서가 미국에서 발견됨으로서 확인됐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동업자에게 오히려 돌을 던졌다.

37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일본의 장래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한다”는 요시노 씨의 증언을 전하는 언론보도에서도 저널리즘을 외면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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