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일보 창립자와 '시일야방성대곡'의 필자 장지연,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총리 등 주요인사들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8일 오후 2시 서울 숙명여대 내 숙명아트센터에서 친일인명사전(전3권)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통해 이들을 포함해 1차로 4389명의 친일행위자를 수록했다고 밝혔다.

친일인명사전에 조선·동아일보 창립자, 박정희, 장지연 등 수록

편찬위는 이날 발표된 명단에 수록된 고려대와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호 인촌·전북 고창 생·1891∼1955) 전 부통령에 대해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같은해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은 뒤 이듬해(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며 "동아일보를 매개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1922년 11월부터)했고,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보관위원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 동아일보 창립자인 고 인촌 김성수. ⓒ인촌기념회 홈페이지  
 
편찬위는 김 전 부통령이 동아일보 사장·취체역과 보성전문학교 교장(1932년 3월∼35년 6월)으로 1936년 11월 '일장기말소사건'의 여파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를 거듭했지만 △1937년 7월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30일과 8월2일 이틀 동안 담당했고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으며 △같은 해9월 학무국이 주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시국강연에 나선 것 등을 지적했다.

편찬위에 따르면 김 전 부통령은 이후에도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고, 8월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에 임명됐다. 1939년 4월엔 경성부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의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를, 1941년 5월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을,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지낸 데 이어, 9월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에 참여하고 10월에 감사로 뽑혔다. 1941년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도 겸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 발표…"인촌 김성수, 조선임전보국단 감사·징병격려 등 친일행위"

김 전 부통령은 조선의 징병제 실시가 결정된 이후 1943년 8월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

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해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으로 됐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11월 6일자 <매일신보> 석간에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을 통해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를 강조했다. 이밖에도 김 전 부통령은 징용을 촉구(경성일보 같은해 11월20일자)하고, 군인원호사업에 힘쓸 것을 강조(12월7일자)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해방 후 김 전 부통령은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하다 이듬해 1월 다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송진우의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됐다. 민주국민당 창당(1949년)에 이어 대한민국 부통령(1951년 6월)에까지 올랐고, 박정희 정권(1962년) 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에 추서됐다.

   
  ▲ 고 계초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조선일보가 방씨 일가의 조선일보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사실상 현재의 조선일보 창립자로 평가받는 방응모(호 계초·평북 정주생·1883∼?) 전 조선일보 사장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편찬위에 따르면 방 전 사장은 대서업·여관업·동아일보 정주지국장·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정주지방부 상무위원을 하다 금광개발에 뛰어들어 1924년 평북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 굴지의 광산업자(교동광산)로 성장한 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일했다. 방 전 사장은 이듬해 조선의 경영권을 인수, 부사장에 취임한 뒤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하고 7월 사장에 올랐다.

이후 방 전 사장은 조선총독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과 일본인 합작으로 만들어진 대아시아주의 황도사상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에 추대되기도 했다(1934년 3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가 각각 정간과 강제휴간(1936년 8월)을 당하자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고 편찬위는 분석했다. 또 방 전 사장은이북 지역을 돌며 강연회와 좌담회를 열면서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한다고 강연해(1937년 2월) 참석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고 편찬위는 전했다.

"계초 방응모, 일제 침략전쟁 옹호 활동"
 
방 전 사장은 중일전쟁 개전 직후 조선일보 간부회의(1937년 7월11일)에선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라는 용어 대신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으며, 이후 지면도 총독부로부터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평을 받았다고 편찬위는 지적했다. 방 전 사장은 같은 해에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 '일제 침략전쟁 정당화 강연(경성방송국)' '지나사변(중일전쟁)과 제국의 결의 강연' 등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 '경성연맹 창립총회 상담역'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 등에도 추대됐다. 일제 말기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1940년)한 뒤 "안으로는 신체제의 독립, 밖으로는 혁신 외교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해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하기 위해 "국민은 이 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해야 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조광> 1940년 11월호).

해방 이후 방 전 사장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고문(1945년 8월말)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9월초)으로 활동했지만 우파단체인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2월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됐다.

이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면서 가장 주목됐던 인물은 박정희(경북 선산 생·1917∼1979) 전 대통령이다. 편찬위가 최근 밝힌 그의 친일행적은 괴뢰국 만주국에서 발행되던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글에 기록돼있다. <만주신문>은 박 전 대통령이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이라고 쓴 편지내용을 미담으로 소개했다.

이 신문이 보도했을 땐 만주군관에서 떨어졌지만 재도전 끝에 입교된 박 전 대통령은 1944년 12월23일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으며 보병 8단 단장의 작전참모 역할을 했다. 이듬해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으나 일본의 패망이후 무장해제된 뒤 자신이 소속됐던 8단을 떠나 광복군으로 합류했고,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박정희, 혈서로 일본군지원·남로당첩자·쿠데타 '눈부신 변신'

   
  ▲ 박정희(가운데) 전 대통령. ⓒ연합뉴스  
 
편찬위가 기재한 박 전 대통령의 이후 행적은 거의 극과 극을 오가는 '눈부신' 변신의 연속이었다.

조선국방경비대 육군소위(46년 12월)→남로당 군내부 조직원 추정→육군사관학교 소령(47년 8월)→남로당 군 내부 프락치로 체포(48년 11월11일)→형집행정지(사형) 및 파면(49년 4월18일)→한국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1과장으로 복귀→준장 진급(53년 11월)→7사단장(57년 3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2군 부사령관(60년 12월)→군사쿠데타(61년 5월16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을 받고 사망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5·16군사쿠데타는 불법이라고 공식 규정됐다.

이밖에도 편찬위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집권해 총리에 올랐다 1년 여 만에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당한 장면(호 운석·서울 생·1899∼1966) 전 총리에 대해서도 친일인명 사전에 올렸다. 장 전 총리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천주교측 대표·1938년 2월), 경성부 정회준비위원회 역원전형준비위원(9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1939년 5월),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9월)을 지냈고,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1940년 7월).

1905년 을사늑약 때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송대곡'이라는 통한의 사설을 게재했던 장지연(호 위암·경북 상주 생·1864∼1921) 전 황성신문 사장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도 일본 천황가 미화

   
  ▲ 고 위암 장지연 전 황성신문 사장. ⓒ연합뉴스  
 
편찬위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 <매일신보> 1914년 12월23일자부터 1918년 12월까지 4년 여 동안 장 전 사장의 실명으로 연재된 '고재만필(古齋漫筆)-여시관(如是觀)'과 한시 등 700여 편의 글을 들었고,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의 시정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글이 실려있었다고 지적했다.

한 사례로 장 전 사장은 1915년 4월3일 '신무천황 제일(神武天皇祭日)'을 맞아 같은 날짜 <매일신보>에 일본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면서 "신무는 영웅의 신명한 자질로 동정서벌(東征西伐)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皇統)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며 "이른바 만세일계(万世一系)란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편찬위는 소개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