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6월항쟁 그리고 거기에 뒤이은 그해 여름의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 벌써 기억에도 아련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은 남북분단이 고착된 이후 남한사회운동의 절정이자 민중적 에너지의 최고의 분출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5, 6년간 우리 사회는 민주화와 통일을 외치는 대중적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노협·전교조·전대협·전민련 등 ‘전’자 돌림의 조직들이 발휘한 지도력은 이 땅을 혁명 전야와 같은 변혁적 기대로 부풀게 하였다.

내가 몸담고 있는 문단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젊은 이론가들이 주축이 되어 종래의 온건한 민족문학론을 비판하면서 ‘민중적 민족문학’ ‘노동해방문학’ ‘민족해방문학’ 등의 깃발을 내걸고 문학이 사회변혁에 복무할 것을 요구하였다. 공공연히 반미를 선동하는 시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고취하는 소설들이 그 젊은 비평가들의 찬양을 받았다.

요컨대 문학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토론들은 민중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이라는 이념적 축에 수렴되었다.
그러나 한 고비를 넘기고 나자 알다시피 세상은 갑자기 달라지고 말았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되고 동유럽의 공산당 정권이 차례로 붕괴되는가 하면 놀랍게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는가.

대안적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신기루처럼 빛을 잃고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무적의 위력으로 전지구적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하여 소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우리의 사회운동세력들은 방향타를 잃어버린 채 기진맥진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상황은 객관적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내 생각에 본질적으로 개선된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노동3권은 여전히 억압적으로 제약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자본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세계화’를 목표로 진행중인 교육개혁은 부분적인 합리화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경쟁주의적 인성의 배출 즉 협동적 인격의 파괴를 겨냥하고 있다. 신문·방송을 포함한 각종 대중매체들은 이러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검증하기 보다 그 자신 소비사회의 첨병으로 되어있다.

얼마전 문화방송노조의 파업은 문제의 사회적 쟁점화에 실패한 채 유야무야되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전교조는 지도부를 제외한 대부분 조직원의 학교복귀를 결정함으로써 사실상의 항복에 동의하였다. 전대협의 후신 한총련은 학생대중의 정서와 괴리된 비현실적 원칙론에 매달려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며칠전 ‘메이데이’는 일과성 행사 이상의 본격적 사회개혁 청사진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지금 이 나라에는 지배집단의 전횡에 압력을 가하는 일체의 제동장치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얻었음인가. 김영삼정부는 제3자개입과 복수노조 허용을 포함하는 노사관계의 법령적·제도적 개혁을 구상하고 위원회를 구성한다고 한다. 이로써 민주노조운동의 오랜 염원이 부분적으로 달성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체 운동의 축적된 역량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닌 모든 시혜적 선물에는 반드시 독이 묻어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운동조직의 실체적 활동은 억압하면서 명목적 제도공간을 확대한들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새로운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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