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미디어는 와인에 취하고, 음식에 반해 있다. 신문들이 거의 매일 와인과 음식, 맛집 기사에 지면을 할애한다. 방송은 아예 관련 프로그램들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전례 없는 유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대중의 관심을 쫓아야 하는 언론 매체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국민소득 2만달러에 이르면, 어느 나라건 와인과 미식에 대한 관심은 크게 증가한다. 우리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의 관심을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 바꿔야 하는 정부도 이 유행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한식 세계화가 이 정부 최대의 문화 정책으로 떠올랐다. 지난 달에는 민관 합동 '한식세계화 추진단'이 출범했다. 영부인인 김윤옥 여사가 추진단의 명예회장을 맡았다. 이 달 초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열린 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고기를 구우며, 한식 홍보에 나섰다. 정부 역시 미식의 달콤한 풍미에 젖어 있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지가 않을까? 뜬금없는 한바탕 소동처럼만 비쳐질까? 많은 국민들이 이 점을 궁금해 한다. 그 답을 구할 만한 후보는 많지 않다. 물론 와인과 음식 평론가는 많다. 하지만 대다수가 해당 업계의 이해와 직결된 인물들이다. 게다가 우리 언론의 속성에 길들여진 이들이 태반이다. 보도에 관해서건, 정부 정책에 관해서건 날을 벼리고 있을 리 만무하다.

박찬일(44)씨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다르다. 그는 기자 출신이다. 잡지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공부 욕심에 훌쩍 이탈리아로 떠났다. 1998년부터 3년간 그 곳에서 와인과 요리 공부를 했다. 귀국 후 직접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조리장을 지냈고,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요리사이기도 하다.

그 동안 2권의 와인 서적과 1권의 이탈리아 요리 서적을 낸 베테랑 와인-음식 평론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와인과 음식에 대한 오랜 고정관념과 오래된 오해,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데 열심이다. 우선 와인과 음식 열풍에 대한 우리 언론들의 보도 태도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조중동 같은 메이저 언론이 어떤 와인이 좋다고 보도하면, 와인 전문가끼리는 그 기사 보고 웃습니다. 또 어느 와인 제조업자나 수입업체가 기자들을 데리고 어디 갔다 왔구나 생각도 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던진 그의 답이다.

   
   
 
그렇다고 기자가 와인이나 음식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그렇죠. 공부를 해야죠. 그런데 기자가 공부를 중시하지 않아요. 와인이나 음식으로 특종상 주는 법도 없고, 편집국장 목표에서도 한 발 비켜나는 거니까." 사실 와인이나 음식만큼 오랜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분야도 없다. 그걸 단순히 경영진이나 담당 데스크가 시켜서 하는 바에야, 기자 개인으로서는 고통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렵사리 자신이 내켜 이 분야를 담당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경력이 쌓일수록 회사가 내쫒을 궁리만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미식 담당기자가 자회사로 쫓겨났다. 한 마디로 언론 매체들이 이 분야를 아무나 해도 되는, 대충 해도 되는 분야로 여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 역시 언론과 비슷하게 안일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식을 발전시켜 국위를 선양하고, 해외동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다고요? 태릉선수촌 벽에 붙어 있는 표어 같은 얘기죠." 그럴싸하긴 하지만 그만큼 구체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얘기다. 당장 기구 만들고, 예산만 쏟아 붓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당장 현장에 있는 요리나 음식 전문가들에 대한 의견 수렴조차 안 돼 있다. 뭐가 한식이냐 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먹는 현대 서울 음식이 한식인가요?" 그가 최근 논란이 된 표준어의 정의에 빗대, 한식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다.

상차림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식을 서양식으로 코스로 내는 것이 세계화인지, 그렇게 되면 전주식 한 상 차림은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우선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자칫 한식 세계화는 국적 불명의 음식을 양산하는 왜곡된 퓨전 열풍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 음식을 나라 바깥에 알리려는 가장 초보적인 노력마저 소홀히 하는 점도 꼬집었다. 공식 홈페이지조차 없다는 것이다.

언론이 전하는, 외국인들의 한식에 대한 감탄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금방 국내에 입국한 외국의 유명 연예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한국이 어떠냐고 물으면 어떻습니까? 갓 바라본 하늘을 가리키며 참 예쁘다고 합니다. 한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맛있다고 하지 않을 세계적인 요리사가 어디 있습니까?" 국내에 와인 열풍을 몰고 온 아기 다다시 남매의 <신의 물방울>이 좋은 예다. 이 연작 만화 13권은 매운 김치와 어울리는 와인이라는 주제의 한국 특집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이디어는 우리 언론이 앞장서 전파해온 주장이다. 와인과 김치는 모두 발효 식품으로 잘 어울릴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럼 치즈와 동동주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립니까? 세상에 얼마나 많은 발효 식품이 있는데. (언론이) 추측을 사실로 발전시킨 거죠." 그의 말이다. 한 마디로 우리 정부와 언론은 한식을 세계화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누구보다 한식을 좋아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포기한 경험이 있다. 대신 이탈리아 요리를 본업 삼았으면서도, 우리 음식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욕심마저 접은 것은 아니다. 그 일을 회고하던 그가 한 마디 던진다. "(개인적으로) 한식세계화 고민단이라도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한 말이지만, 미디어든, 정부든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와인과 음식 평론이든 한식 세계화든 더 깐깐한 사람들이 나서서, 더 깐깐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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