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우리 정치사의 분수령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은 군부 독재를 마감하고 문민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도한 3당 합당이라는 기형적 형태를 통해 문민화를 이뤘다는 것이 한계였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폭발적 욕구를, 낡은 정치인을 통해 충족시켜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 운명이 극적으로 엇갈린 사람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낡은 방식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부산 지역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수난을 자초했다. 그는 3당 합당을 ‘집권욕에 눈이 먼 야당 지도자들이 군사독재 잔당인 여당과 벌인 밀실 야합’이라고 공격했다. 자신의 명분을 좇아 합당을 거부하고, 이른바 ‘리틀 민주당’에 남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자신의 부산 지역구에서 낙선했다. 연이어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떨어졌다. 1996년 15대 선거에서는 종로구에서도 낙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의 별명 그대로 바보처럼 실리를 버렸다. 지역주의와 계파 정치가 난무하는 낡은 정치에서 오로지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노 전 대통령이 비록 낡은 방식으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새로운 정치의 표상이 된 것은 그래서였다.

김동길 교수, 참신한 정치 입문과 추악한 정치 역정

   
   
 
반면 김동길 교수의 출발은 참신했다. 국내의 대표적 사학자이자 종교인으로, 그는 신랄한 정치·사회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다. 방송에서 비평을 할 때마다 후렴구처럼 읊조리던 ‘이게 뭡니까?’라는 말은, 당대 최고의 유행어이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정도였다. 현실 정치를 비판하던 그는, 1991년 자신의 정당(새한당)을 만들어 정치에 뛰어들었다. 쉽지 않았을 결단이었고 예사롭지 않은 정치 참여였다.

그러나 그 후의 행적은 낡은 정치 그 자체였다. 1992년 그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선에 참여하기 위해 급조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했다. 대가는 달콤했다. 14대 총선에서 원내에 진입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이 대선에서 패배한 것과 당을 저버린 것은, 아마 김 교수로서는 최초의 시련이었을 것이다. 당시 김 교수는 그간 호형호제한다던 정 명예회장을 앞장서서 공격했다. 당사 마련 자금을 놓고 벌인 두 사람의 언행은 한 편의 코미디를 방불케 했다. 김 교수는 동료 의원들과 함께 정 명예회장에게 당사를 지을 돈을 내놓으라며 농성을 벌였다. 이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응수가 날카로웠다. “당사 지으려면 자기네 집 팔아서 지으면 되지, 왜 나한테 돈 달라는 거냐?” 홧김에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던 한 노회한 기업가의 말이긴 하지만, 김 교수의 낡은 정치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었다.

정 명예회장이 떠나고 난 뒤, 그는 국민당 대표의 자리에 올랐다. 정치권에서 소수 세력으로 남게 된 그는 그 후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추악한 싸움에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 아니라고 우긴 코미디

1994년경 그에게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원칙과 소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이 주도하는 국민당 잔류파와 박찬종 의원의 신민당, 김종필 의원의 자민련의 합당 과정이 그랬다. 특히 박찬종 의원과는 신민당 총재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각목 전당대회 사건이 터졌다. 전당대회장에 각목을 든 청년들이 난입해 전당대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각목을 든 조직폭력배가 전당대회에 등장하는 일은 한국 정당사상 가장 전형적인 정치 구태였다.

당시 김동길과 박찬종 의원 측은 신민당 대표 자리를 놓고, 당대표등록 변경 신청과 대표등록정지 가처분 신청으로 팽팽히 맞섰다. 중앙선관위가 개입해야 할 정도였다. 각서 파동이 터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양순직 의원은 김동길 교수가 신민당 창당과 관련해 자신에게 각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가 대통령 후보를 맡는 대신 자신이 당 대표를 맡는다는 내용의 합의였다. 김 교수는 즉각 부인했다. 양 의원은 곧 각서 원본을 공개했다. 김 교수는 원본이 조작됐다고 반박했다. 양 의원의 제기로 시작된 명예훼손소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친필 감정 작업까지 동원됐다. 결과는 김 교수의 패배, 양 의원의 승리였다.

훗날 양 의원은 자신의 저서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에서 각서 파동의 전말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김 교수)의 사인은 신문 칼럼 등에 소개되어 익히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니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받았으면 받았다고 하지, 책임 질 일이 있으면 책임 지지

김 교수의 정치 말년인 1996년은 더욱 우울했다. 그 해 초 그는 자민련의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15대 총선이 끝나자마자 탈당하고,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정계 은퇴는 선거를 전후해 터진 전국구 공천 헌금설에서 비롯됐다. 돈을 받고 전국구를 팔았다는 논란이 커지자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난 것이다. 정치판을 바꾸고야 말겠다고 호기를 부렸던 그가 5년여 머물렀던 정치권에서 남긴 유산은 보잘 것이 없었다. 거의 매년 다른 이름의 당에 몸 담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계파 정치·폭력·돈 같은 우리 정치의 가장 어두운 유산과 관련한 추문마저 남겼다.

그런 그가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전후해, 노 전 대통령에게 포문을 열었다. 그의 논지를 한마디로 하자면, 받았으면 받았다고 하라는 것이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는 주장이다. 김 교수의 실패한 정치 실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을 것이다. 받았으면 받았다고 하고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권에 철새처럼 왔다 철새처럼 떠나고 말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정치적 실책에 대해 책임진 적이 없다. 그런 그는 원칙을 지킨 노 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비난할 자격이 없다. 심지어 지나치게 독단적인 행보로 국민적 원성을 사는 이명박 대통령마저 비난할 처지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자, 그는 이번에는 추모객들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자신이 ‘바지에 똥이라도 쌌느냐’는 것이다. 이 반론 또한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나이가 들어 신체적 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결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노인성 치매 같은 질병에 걸리는 것도 남들이 타박할 일은 아니다. 진짜 부끄러워 할 일은 따로 있다. 원칙 없이 구태란 구태는 다 저지르는 일, 남한테는 한 없이 엄격하면서 자신한테는 한 없이 관대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노추(老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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