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존엄사를 허용했다. 존엄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예상되지만 소생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가 의미 없이 생명만 연장하면서 환자 본인과 가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안기는 안타까운 현실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대부분 언론이 법원의 판결을 일단 환영하면서도 존엄사의 남발을 우려하고 제도 마련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논란에서 간과되고 있는 부분은 경제적 이유로 존엄사를 선택하는 경우다.

이번 판결에서 법원은 4가지 요건을 제시했는데 첫째,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판단이 있어야 하고 둘째, 환자의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 중단 의사가 확인돼야 하고 셋째, 산소 호흡기를 떼는 등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치료만 중단 대상에 포함될 수 있고 넷째, 반드시 의사가 의료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이 요건을 충족하지 않은 안락사가 이미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 조선일보 5월22일 4면.  
 
서울대 병원이 18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병원은 2007년 한 해에 말기 암 환자 656명 가운데 123명에게만 심폐 소생술을 하고 나머지 433명은 가족들의 거부 의사를 받아들여 연명 치료를 중단했다. 이번 법원 판결 이전에도 연명 치료 중단이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이야기다. 이 가운데는 법원이 제시한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 있을 수 있는데 특히 경제적 여건 때문에 가족들이 이에 동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22일 대한의사협회 좌훈정 대변인은 "경제적 이유로 존엄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면서도 "무의미한 연명 치료와는 관계없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좌 대변인은 "존엄사에 대한 제도 마련과 함께 연명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지속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지원방안이 보장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실련 사회정책팀 김태현 국장은 이날 "존엄사를 허용한 이번 법원 판결과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를 테면 말기 암 선고를 받아 치료를 포기하고 병원을 떠나는 경우는 애초에 존엄사 논란과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이번 판결은 연명 치료를 계속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 국장은 그런만큼 존엄사의 요건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월 존엄사 허용과 관련한 입법 청원을 내기도 했던 김 국장은 "상당수 언론이 혼동하고 있지만 존엄사는 안락사와 구분돼야 한다"면서 "의사나 가족들이 회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포기하거나 과도하게 생명을 중단시키는 행위가 없도록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회생 가능성이 있는데도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없도록 연명 치료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것은 이번 판결과 별개로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존엄사 허용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는 일부 종교 단체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일부 보건단체들이 우려를 표명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존엄사 허용에 앞서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고 김정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경제적 이유로 생명을 포기하는 압박을 받지 않도록 의료보장 확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22일 4면 "경제적 이유 탓 존엄사 남용 막아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현재 연명 치료 거부 결정 10건 가운데 8~9건은 환자가 아닌 가족에 의해 결정된다"면서 "경제적 취약 계층은 의학적 상태와 관련없이 생명 연장 중단 치료를 선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의료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이 신문은 "저소득 계층에게는 필수 생명 연장 치료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존엄사의 남용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상당수 언론이 저소득 계층의 존엄사 남용을 우려하고 있지만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수준의 원론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저소득 계층이 경제적인 이유로 안락사를 선택할 확률이 높고 애초에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감안하면 존엄사의 제도 마련과 별개로 저소득 계층에 대한 의료비 지원이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된다. 애초에 존엄사를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상당수 언론이 간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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