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51) 소장을 만나러, 서울 성산동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반팔 셔츠에 빛바랜 청바지 차림이다. 인사를 건네자 묵묵히 명함을 받기만 할뿐, 자신의 명함을 건넬 생각이 없다. 아예 앉으라는 말도 없다. 무뚝뚝한 그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사무실에 빽빽하게 꽂히고 아무렇게나 널린 책들이다. 그것만큼 그의 일과 스타일을 대변해주는 것도 없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출판 비평가이자 다독가(多讀家). 출판계에 가차없는 독설을 날리기로 유명한 그다.

그와 출판의 인연은 이렇게 단순화시키기에는 너무 길고도 질기다. 1980년 그는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그 후 야학 교사를 하다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소규모 지방 출판사를 거쳐 몸담게 된 곳이 우리 출판계의 양대 산맥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창작과비평’사. 그 곳에서 그는 15년 동안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출판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퇴사 후 만든 것이 현재의 연구소. 그 곳에서 그는 <기획회의>나 <북페뎀> 같은 출판 잡지와 단행본을 펴내고 있다.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  
 
자리에 앉으면서 가벼운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요즘 출판계가 어떤가 하고. 비교적 경기에 민감한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면 상당히 힘들지 않을까 해서다. “어렵지 않았던 적이 없죠. 게다가 요즘은 다들 힘들잖아요?” 그의 말이다. 좀 싱거운 대답이다. 그러나 출판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이렇게 끝낼 리가 없다. 잠시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역시 그가 사무실 책상을 뒤져, 책 몇 권을 주섬주섬 챙겨온다. 그 가운데 일본어로 된 책 한 권을 쓱 내밀며, 다시 말문을 연다. “최근에 읽은 책입니다. 힘드냐고요? 이렇게 표현해보죠. 과거의 경쟁이라는 건 골목대장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삼성이나 LG도, 소니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해야 살아남는 시대죠.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전에는 우리끼리 그나마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이제 전 세계에서 작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출판사나 저자나 서로 마찬가지죠.” 

다른 산업처럼, 출판계 역시 글로벌화 되면서 무한 경쟁에 노출됐다. 이는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자를 낳았다. 그가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정보화, 세계화로 세상에 선택의 기회가 널렸죠. 이걸 두고 기회의 장이 펼쳐졌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말은 90%이상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출판계의 전체적인 시장 규모는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이 개방되고 보니, 힘있고 능력 있는 소수가 독과점하는 형태로 가고 있는 게 문제죠.”

그렇다면 책의 미래나 미래의 책은 어떨까? 책이라면 질색해 마지않는 세대를 대변해 물어보자. 필요한 정보라면 인터넷에서 다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도 독서가 필요할까? 그는 정보의 유용성 면에서 웹과 책에 대한 평가를 달리 했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은 웹에서, 사람들을 길을 잃고 만다. 반면 책은 오히려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서점에는 특정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 책이 많다. 그곳에 들러 책을 잘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는 “사람들은 대개 비평적 안목과 감각을 갖고 책을 대한다”면서“그것이야말로 미래에도 책의 존재 의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출판계는 기술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벌어졌다. 컴퓨터 덕에 한 달이 꼬박 걸리는 책 편집 작업이 하루로 충분해졌다. 비용을 아끼려는 출판사들은 아예 편집자들을 계약직으로 뽑기도 한다. 출판 기획부터 출판, 홍보까지 거의 모든 일을 아웃소싱 할 수 있게 돼서다. 일부 대형 출판사들은 프로젝트성 출판도 시도하고 있다. 몇몇 외부 편집자들이 낸 출판 아이디어 가운데 골라서 책을 발간하는 방식이다. 출판사로서는 펴낼 책이 줄어 좋다. 외부 편집자가 모여 구성된 프로젝트팀 역시 대형 출판사 브랜드로 책이 나와 판매에 효과적이다.

출판계의 이 효과적 시스템은 조만간 미디어 업계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의견도 같았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문이 어렵다는 데, 왜 메이저 언론사에는 몇 백 명의 기자가 상주합니까? 일주일에 한 꼭지 겨우 써내는 기자도 태반이구요.” 올 것이 왔다. 그가 출판 담당기자를 중심으로 해 우리 언론을 겨냥했다.

   
   
 
“책 담당 기자들만 봐도, 출판사에서 공짜로 보내온 책들 중에서만 리뷰를 합니다. 현장에 나와서 사람을 만나거나 해당 분야에 대한 공부는 별로 안 해요. 좀 부족하다 싶으면 전화 몇 통 돌려서 인용하면 그만이고.” 어려워진 신문업계를 탈출한 기자들이 출판계로 몰려드는 현실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출판 기자 10년하고 퇴직하면 출판사 가서 기획하고 책 만들 수 있을까요? 자기 분야에 대한 공부 열심히 안 해서 업계 돌아가는 흐름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에서 나오고 나면 앞이 막막한 거죠. 메이저 언론사에 있었던 기자일수록 더 힘들어하는 이유도 바로 그겁니다. 그동안은 매체 파워로 저절로 취재돼 오는 기사,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인터뷰 대상자만 만나왔거든요. 보도자료 대충 베껴 쓰기도 하구요.”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장 논리는 이미 우리 출판과 미디어 업계 지형을 바꿔놓고 있다. 당장 외부 전문가들에게 아웃소싱 하는 언론들도 막 태동하고 있다. 앞으로 한 소장의 독설이 좀 줄어들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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