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민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겠다.”

용산 참사 직후 이명박 대통령은 책임자 처벌보다 제도 정비가 먼저라며 이렇게 말했다. 올바른 현실 인식이다. 그러나 용산참사 100일이 다 되어가도록 정부와 정치권의 공약은 이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참사 직후 제출됐던 몇몇 재개발 관련법안은 국회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김희철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 한 건만 최근 국회 소위를 통과했는데 이마저도 심의과정에서 순환개발 등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남았다.

한국일보가 28일 ‘용산참사 100일’을 진단한 기사에서 “사건이 터지면 잠시 관심을 보이는 척 하다가 잠잠해지면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구태가 여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쓴 소리를 한 것은 시기 적절한 비판이다.

한국일보가 10면 <정부·정치권 “제도 정비” 약속, 역시나…>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용산참사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 언론이 무관심한 사이 재개발 갈등이 곳곳에서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만 재개발이 예정되거나 진행 중인 지역이 550여 곳이고, 이중 상당수가 조합과 세입자간 갈등을 겪고 있다.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장 ‘용산 참사’가 일어난 용산4구역 남일당 건물 맞은편인 서울 용산역 앞 제2·3 도시환경 사업구역이 용산참사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주민들이 망루 쌓을 높은 건물을 찾고 있다고 내놓고 말하고 다닐 정도다. 용산구 서부이촌동 일대 아파트 벽면에는 ‘사유재산 강탈하는 서울시장 물러나라’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고, 동작구 상도4동 재개발 지역도 ‘목숨 걸고 끝까지 투쟁한다’는 글들이 도배돼 있다. 서대문구 북가좌동 가재울 뉴타운 3구역과 왕십리 뉴타운 2구역 등 다른 재개발 지역도 똑같은 갈등을 겪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애초 약속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고, 언론도 용산에서 눈을 돌림으로써 제2의 용산사태를 방치하고 있다. 특히 빨리 달아올랐다 금세 식어버리는 언론의 ‘냄비근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29일로 ‘용산참사 100일’을 맞는데도 용산사태의 해결을 촉구하거나 해법을 제시하는 주류언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22일 인터넷언론 프레시안에는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2차 시국회의’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장소에서 천막을 설치하려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용산참사 유족들이 부상당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기사와 사진이 게재됐지만 다음 날 주류 언론에서는 이날 기자회견 기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용산사태의 근본적인 원인과 재발방지책을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기는커녕 용산 철거민을 바라보는 시각조차 여전히 냉소적이다.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지난 23∼24일 용산참사 유족돕기 콘서트를 열고, 27일 ‘용산 살인진압 100일 추모주간’으로 선포하고, 29일 범종단 기도회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을 단신으로나마 소개한 언론은 극히 일부였다.

반면, 지난 28일 공사 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전철연 간부 3명이 구속됐다는 철거민 흠집내기 기사는 <용산 재개발 공사 조직적으로 방해 5700만원 뜯은 전철연 간부 셋 검거>(중앙일보), <’조합원 폭행-합의금 갈취’ 전철연 간부 3명 입건>(동아일보), <용산 재개발 돈 받은 전철연 간부 구속>(문화일보) 등 조·석간에서 다뤄졌다.

용산참사 사태를 이성으로 따져보기 전에 동정이나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보도도 많았다. 그나마 용산 철거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도해온 한겨레도 지난 23일자 10면 <유가족 편지 낭독에 ‘울어버린’ 용산참사 첫 공판> 기사에서는 용산사태 첫 공판 소식을 전하면서 ‘눈물’에 초점을 맞췄다. 황희석 변호사가 용산참사 때 숨진 전철연 회원 윤용헌씨의 아들(19)이 인터넷 블로그에 아버지를 추억하며 올린 글을 읽어 내려가자 방청객 사이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는 보도는 용산사태의 논점을 흐릴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용산참사 범대위는 4월 마지막 주를 용산 희생자 추모주간으로 선포하고 29일 100일 추모제를 시작으로 내달 2일 촛불1주년 집회까지 다양한 행사를 열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 검찰은 이달 말부터 5월초 전국 각지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각종 불법집회 참가자들 전원을 현행범으로 간주하고 적극 체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물리적인 충돌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은 ‘용산참사 100일’의 풍경을 또 어떻게 보도할까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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