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또다시 독재 정권이 발을 붙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언론인들의 손에 줄줄이 수갑이 채워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시국을 비판하는 소리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봐야 하는 시대가 다시 오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평검사가 TV공개토론에서 대통령과 맞장토론을 하고, 시민들은 경찰서에 가서도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다하고, 언론들은 복날 개 패듯 연일 대통령을 두드려 댔다. 분명 대한민국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민주주의 국가였다. 그런 민주주의의 단맛을 본 국민들 앞에서 어설픈 독재는 한 치도 설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난해 5월 거리를 뒤덮었던 촛불시위 때는 어땠는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 국민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마이웨이 국정’을 고집하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거대한 촛불시위로 맞섰다. 화들짝 놀란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납작 엎드리며 사과를 했다. 그 일부를 옮겨보자.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온갖 비난의 소리가 들리는데 제가 무엇을 위해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국민과 소통 하면서,국민과 함께 가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할 시간입니다.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시 국민 여러분께 다가가겠습니다.”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는 대통령을 보면서 이젠 대한민국에 권위주의적 정부는 더 이상 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시대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는 거라며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촛불 1주년을 맞은 지금 그러한 믿음은 여전히 유효한가? 되돌릴 수 없을 것으로 믿었던 민주화의 시계바늘이 놀랍게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거꾸로 가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한 토막. 며칠 전 서울의 모 학교 선생님의 교직원용 메신저에 황당한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학교 관리자 명의로 보내진 그 메시지 내용을 들여다보자.

‘언행조심: 술자리 모임자리 등에서 국가시책 험담 비판 등. 촌지수수 근절. 조사지역 학교교문 앞 백화점 우체국 택배 등. 스승의 날 전후 집중 조사. 각별히 몸조심할 것’

지금이 유신독재 시절이냐? 여기가 5호 감시제가 작동하는 북한이냐? 이 나라가 비밀경찰 KGB의 감시를 받는 공산 소련이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어느 나라에서 국가시책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교사들의 입을 틀어막는다는 말인가? 교사들을 촌지나 수수하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의심하는 것인가? 그들의 가방은 언제 어디서라도 맘대로 뒤질 수 있다는 말인가?

교권침해와 인권모독의 불쾌한 언어들로 가득한 저런 메시지는 여러 선생님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항의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몸을 사리라고 당부하는 학교 관리자나, 이런 모욕적인 메시지를 받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선생님들이나 한심하기로는 오십보백보다. 그런 주눅의 틈새를 파고드는 건 바로 이미 박멸됐다고 착각하는 ‘독재 바이러스’다.

언필칭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움츠러드는 걸까. 아마도 독재정권이 휘두르던 무자비한 몽둥이찜질의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재정권의 진저리나는 물리력에 대한 조건반사일 것이다. 정부 욕하면 잡혀간다는 그 소박한 공포. 게다가 비판적 언론인들을 잇달아 구속하는가 하면 노무현 게이트, 박연차 리스트, 장자연 리스트 등을 다루는 섬뜩한 검찰과 경찰의 칼춤이 국민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이명박 정부는 이런 틈을 이용해 날치기 정책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운하 건설로 의심받기에 충분한 4대강 개발을 밀어붙이고, 여당 내에서조차 반발이 심한 다주택자 양도세 완화를 강행하고, 안보위협 논란까지 일고 있는 제2롯데월드 신축을 허용하고 있다.

지금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경찰서는 고사하고 동사무소 문지방을 넘을 때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권위주의 시대를 다시 맞게 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독재를 불러들이는 것은 저들의 야만보다 이런 주권을 포기하는 우리의 소심이다.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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