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이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촛불재판’을 맡은 판사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거나 전화를 한 것은 재판 진행 및 내용에 관여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이번 사건을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올리도록 지시했다. 현직 대법관이 공직자윤리위에 회부되는 건 사법사상 처음이다.
17일자 주요 전국단위 종합일간지들은 대부분 이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처리했다. 그러나 ‘조중동’으로 묶여 불리는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3개 신문만 이 사안의 비중을 다르게 판단했다. 조선일보는 아예 1면에서 다룰 만한 게 아니라고 봤다. 이 신문 입장에서 보면 다른 신문들이 호들갑을 떠는 꼴이다.
다음은 17일자 주요 아침신문들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신영철, 촛불재판 관여”…윤리위 회부>
국민일보 <“신영철, 재판에 관여”…윤리위 회부>
동아일보 <알카에다 소년 자폭테러에 당했다>
서울신문 <신영철 대법관 윤리위 회부>
세계일보 <“촛불재판 개입·직권 남용”/ 신영철 대법관 윤리위 회부>
조선일보 <“개성길 열흘 막히면 버틸 기업 없다”>
중앙일보 <아고라 3명 ‘인터넷 여론’ 조작>
한겨레 <신영철 대법관 ‘촛불재판 개입’ 결론>
한국일보 <신영철 대법관 윤리위 회부>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의혹을 조사해온 대법원 진상조사단(단장 김용담 법원행정처장)은 16일 대법원 4층 대회의실에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단은 “합헌·위헌 구별 없이 재판 진행을 독촉하는 의미로 읽힐 수 있는 메일을 반복적으로 보냈고, 실제 그런 취지로 이해한 법관이 일부 있었던 점을 종합해 보면 신 대법관의 일련의 행위는 재판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또 “촛불사건 피고인의 보석사건을 맡은 최모 판사에게 휴대전화로 ‘시국이 어수선할 수 있으니 보석을 신중하게 결정하라’는 취지로 말한 것은 재판 내용에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촛불재판 배당과 관련해서도 “재판부 지정 기준이 모호하고 납득할 설명을 하지 못하는 점 등에 비춰 ‘배당 주관자의 임의성이 배제되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배당 예규의 취지를 벗어나는 사법행정권의 남용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조사 결과, 신 대법관이 촛불사건을 골고루 배당하기로 약속한 뒤에도 관련 사건 96건 중 61건은 무작위 배당됐지만 25건은 일부 재판부 사이에, 10건은 특정 재판부에 지정배당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대법원장의 메시지라며 보낸 이메일 중 ‘나머지 사건은 현행법에 따라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부분은 신 대법관이 본인 생각을 가미해 작문한 것이라고 조사단은 발표했다. 평소 소신을 대법원장의 권위를 빌려 판사들을 설득하려고 대법원장의 뜻을 전하는 것처럼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조사단은 작년 10월9일 박재영 당시 판사가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기로 결정한 뒤인 같은 달 13일 오전 신 대법관이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을 찾아가 만났던 사실도 새로 확인했다. 신 대법관은 “헌재에 계류된 사건이 많아서 빨리 처리해달라는 취지로 말하러 갔는데 소장은 사건이 접수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다른 덕담만 해서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할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조사단은 전했다.
이 대법원장은 김 처장에게 조사 결과를 법적으로 평가하고 책임소재를 규명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위원장 최송화 서울대 명예교수)에 올리라고 지시했다. 대법원장이 법조브로커 김홍수로부터 식사 등을 접대받은 부장판사 4명의 비위사건을 2007년 1월 윤리위에 회부한 적이 있지만 대법관 관련 사건이 회부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대법원장은 심의 결과에 따라 법관징계위원회에 징계를 청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동아·조선·중앙일보 등 ‘3대 보수지’는 자칭 ‘정론지’답게 ‘마이 웨이’를 가고 있다. 1면 편집이 그렇다. 동아일보는 A1면에서 3단 크기 기사 <신(申)대법관 재판 관여 소지…윤리위 회부>에서 이 소식을 전한 뒤 A8면 통단 기사 <신(申)대법관 “시위관련자 보석 신중히 결정” 판사에 전화>를 통해 조사단의 조사 결과 드러난 점을 자세히 전했다.
이 신문은 신 대법관의 거취 관련해선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같은 면 기사 <대법원장이 윤리위 회부 지시/ 신(申)대법관 거취표명 여부 관심>에서 “신 대법관은 일단 침묵으로 대응했지만 거취 문제는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책임 소재 규명 결과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 대법원장은 그(공직자윤리위) 의견에 따라 법관 징계위원회에 신 대법관의 징계를 청구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징계 자체가 신 대법관의 거취를 결정짓진 않지만 경미한 징계라도 내려질 때에는 계속 자리를 지키기는 힘들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많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그러나 “대법관이 징계 대상이 되는 일 자체가 사상 초유의 일이어서 징계에 해당하는 사안인지 관련법에 대한 면밀한 법리 검토를 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 동아일보 3월17일자 사설. | ||
또 “집시법의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 대한 위헌심판이 제청됐더라도 다른 판사들은 재판을 정상적으로 진행하도록 당부한 것과, 양형통일을 위해 경험 많은 부장급 단독판사에게 촛불사건을 집중 배당한 것도 사법행정권을 일탈한 것으로 봐야 하는지 신중히 따져봐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파문을 정치쟁점화하거나 진보 대 보수의 싸움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기회에 법관 경력 5년 정도의 단독 판사들이 주요 사건을 혼자서 재판하는 경력법관제에 대해 근본적인 수술을 검토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A3면에만 관련 기사 세 꼭지를 배치했다. 이 신문은 이 면 머리기사 <대법원, 신영철 대법관 윤리위 회부>에서 “법원 내부에선 이번 사건이 촉발된 원인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나오고 있다”면서 “소장 판사들은 사법부가 지나치게 관료화된 것이 이번 사태를 유발했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반면 고참 판사들은 노무현 정권 때 특정 정치성향이 짙은 판사들이 법원을 장악하면서 사법부가 '코드화'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고 보도했다.
이어 “그러나 법원 내부에선 시시비비를 떠나 이번 사태로 판사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우면서 사법부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곤두박질 치게 만들었다는 자성론(自省論)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법조계 반응과 관련, “법조인들은 법원 지휘부의 반성과 제도 개선뿐만 아니라 일부 일선 판사들이 판결에 주관을 개입시키거나, 정치성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경향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면서 “신 대법관의 행동이 도(度)를 넘어서 재판에 간섭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집단행동으로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일부 형사단독 판사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불법시위를 벌인 사람들을 처벌하기 싫다는 의사를 드러내놓고 표시하지 않았느냐. 법원 내부가 권위가 실종된 무정부 상태에 빠지면서 묵묵히 일하는 다수 법관이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됐다”는 고등법원 부장 판사를 지낸 한 변호사의 말을 인용했다.
▲ 조선일보 3월17일자 A3면. | ||
이 신문은 사설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신문은 사설 <법원이 이념과 세대로 찟겨선 국민이 신뢰 못해>에서 “국민은 이번 파동을 통해 대한민국 법원이 횡적(橫的)으론 이념의 좌우(左右)로, 종적(縱的)으론 세대(世代) 간 갈등으로 크게 찢겨 있고 사법부 안에 세계 어느 나라 사법부에도 없는 사조직(私組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또 “지난 정권 불과 몇년 만에 대법관 15명과 헌법재판관 11명이 교체될 만큼 정치권력은 사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고 그 정치권력과 성향을 같이하는 법원 내 사조직이 재야 법조단체와 손을 잡고 사법권력을 좌지우지했던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이번 파동의 막전막후(幕前幕後)에서 법원의 이런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사법권력 내부의 갈등 분위기를 느낀 사람이 적지 않다”고도 했다.
▲ 중앙일보 3월17일자 사설. | ||
▲ 경향신문 3월17일자 4면. | ||
윤석민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과)는 조선일보 ‘아침논단’ 코너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신문 독자들을 상대로 언론관계법 개정 논의와 관련, “선동에 놀아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디어법 개정 논의 관전법>이란 제목의 이 글에서 “미증유의 국가위기 앞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끝까지 싸우는 정치권을 보면 귀는 없고 입만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논의가 진전될수록 윈-윈의 접점을 찾기는커녕, 더욱 공격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려다 보니 갈등은 악순환으로 증폭된다”며 “미디어법을 둘러싼 갈등이 그 전형”이라고 말했다.
▲ 조선일보 3월17일자 A34면. | ||
이어 “하지만 이들이 쉽게 바뀌겠는가. 결국은 국민들이 눈 크게 뜨고 선동에 놀아나지 않는 수밖에”라며, 복잡한 법안의 내용을 "xx악법"처럼 구호나 캐치프레이즈로 축약해 선입관을 심거나 특정대상(예를 들어 일부 신문사)을 집중 공략해 공격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등을 선전의 주요 기법들로 거론했다. 그러면서 “이런 점들만 살펴도 국민들은 누가 선동을 획책하는지 분별하며 현재까지 및 향후의 미디어법 개정논의를 한층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