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방송·통신 융합 정책이 통신 사업자의 방송 시장 진입을 돕는 데에만 집중되고 있다는 비판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국민의 세금으로 특정 사업자를 지원하는 모양새란 지적이다. 또 기업 간 인수·합병에 따른 여론 시장 집중을 막을 수 있도록 규제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박승권 한양대 교수(전자통신공학부)는 11일 서울 목동 한국방송회관에서 한국방송학회 주최로 열린 '방송통신산업의 재편에 따른 정책과제' 세미나에 참석, "현재 방송통신위원회의 융합 정책은 통신망을 통한 방송 서비스 제공으로 집중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통신 사업자의 방송 사업 진입에 과도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450억 원을 들여 전국 1만1000여 개 초·중·고교에 인터넷멀티미디어방송(IPTV)을 설치,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통위의 지난 2일 발표를 언급하면서 "현재의 IPTV가 양방향성 및 서비스 지원 능력 면에서 디지털케이블TV에 비해 전혀 우월하지 않은데 IPTV 플랫폼만 지원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지상파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과 위성DMB를 공존토록 해 놓은 정책당국이 또 다시 모바일 IPTV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면서 "현재 방송통신위원회의 정책은 추진 사업자 중심의 정책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매체도 생존하거나 건전하게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방법도 강구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은기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과)는 네트워크를 보유한 통신 사업자가 방송 시장에 진출하는 식의 일방적인 융합 과정의 진행이 △시장의 집중 △유효 경쟁 위협 △여론 시장에서의 다양성 감소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성기현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사무총장은 방송·통신 산업 간 균형 발전 방안과 관련, "방송 정책과 통신 정책의 근간이 각각 방송법과 전기통신사업법으로 다른 데 따른 규제, 정책, 산업의 규모 등에서의 비대칭성을 해소하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 한국방송학회는 11일 서울 목동 한국방송회관에서 '방송통신산업의 재편에 따른 정책과제'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었다.  
 
이날 세미나에선 융합 환경에서 시장 집중과 기업 통합이 어떤 수준과 조건 아래에서 허용돼야 하는지와 관련한 지적과 제언도 나왔다. 안재경 서울산업대 교수(산업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유·무선 통합과 방송·통신의 융합 추세에 따라 미디어 기업 간 인수·합병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인수·합병이 뚜렷한 효율성 증진 효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면서 "되레 공공성·공익성이 보장되지 않은 합병으로 미디어 기업의 독립성과 의견 형성의 다원성이 보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조은기 교수는 "이번에 논란이 된 KT·KTF 합병의 경우 그 자체론 혼합 결합의 성격을 갖지만 실제의 시장에서 특정 서비스가 판매되는 현실을 감안할 경우 KT의 서비스(유선전화, 초고속인터넷, IPTV)와 KTF의 서비스는 '관련된 시장'에 존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융합 환경에서 집중과 기업 결합의 반경쟁성을 판단하기 위해선 시장의 현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 개발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현재 국내의 경우 여론 시장에 대한 규제 프레임이 명료하게 제시된 게 없으며 시장의 단위 역시 지역과 전국 시장이 혼재된 상태"라면서 "경쟁법 상의 집중과 기업 결합 외에 방송·통신 융합 시장에서 시급히 고려돼야 하는 건 여론 시장 집중에 대한 규제 프레임의 개발"이라고 강조했다.

통신 사업자와의 경쟁과 상업화 속에서 방송 서비스의 공공성을 보장하는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조은기 교수는 "방송 시장에서 경쟁이 그 자체로 다양성을 보장하는 건 아니며 외려 경쟁은 시청자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시장에서 축출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며 "때문에 정책적 관점에서 제공될 수 있는 서비스와 그렇지 않은 서비스를 구분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진용 한국방송협회 사무총장은 "언론의 상업화가 촉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의 공익성·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해선 지상파 방송을 통한 공공 서비스 양을 늘리고 질도 높여야 한다"면서 "특히 무료 공공 서비스 시장과 유료 상업 방송 시장을 분리·획정하는 게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성기현 사무총장은 "융합 하에서 거대 통신 자본의 영향력 증대로부터 방송의 고유 가치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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