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구는 봉건영주의 사회를, 증기제분기는 산업자본가의 사회를 양산했다.” 이것은 칼 마르크스가 무정부주의자인 프루동의 과학적 오류를 비판한 저서 ‘철학의 빈곤’에서 내린 분석이다.

사회질서는 본질적으로 노동수단과 결합되어있다는 이 오래된 가르침에는 사회적 생산력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지난 한 세기동안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산업자본가의 경제적 지배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커뮤니케이션기술이 본격적인 사회적 생산력으로 전화되면 또 다른 사회질서를 양산할지 모른다.

기술발달과 콘텐츠의 질은 반비례?

지난주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빗’ 정보통신박람회에서는 인터넷 기반사회인 웹사이어티(Webciety)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소비가전, 소프트웨어, 차세대 e-솔루션 등 전세계 4300여개 정보통신(IT)업체가 참여한 세빗은 모바일 멀티미디어 기술을 통해 본격화한 상품세계의 세계화 수준을 가늠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런 급속한 기술발달에 따른 비판이 적지 않다. 먼저 문화적 비판인데, 얇아지는 평면TV화면만큼이나 콘텐츠의 품질이 얄팍해지고 있다. 더구나 단말기 한 대 생산에 소요되는 원자재가 소형자동차의 그것과 맞먹기 때문에 환경보존이라는 인류대사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다. 세빗 쪽은 이를 우려했는지 환경 IT 전시구역을 마련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번 세빗에서는 소프트웨어와 같은 지적 생산물로 수익을 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현실이 잘 드러났다. 하드웨어기업들도 더 이상 물질적 생산에 멈추지 않고 유연한 소프트웨어사업에 진출하여 이윤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런 지식정보기업의 내부조직과 업무방식은 기존 회사와 많이 다르다. 중소기업은 물론 대형 IT기업들도 기존의 견고한 위계구조에서 탈피하고 있다. 예컨대 독일 남부 발도르프에 있는 대형 소프트웨어회사인 SAP에는 1만여명이 근무하는데, 회사조직은 겨우 3개 범주-경영진, 제품설계사, 그리고 기타-로 분류된다고 한다. 신입사원은 누구나 카오스 상태나 다름없는 ‘기타’에 배속 받아 느슨한 팀제 속에서 스스로 창조적인 업무를 찾아야 한다. 팀제가 업무 동기 유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자본’ 개념에 인간의 창조성과 팀워크 능력까지 추가되는 현실이 전개되고 있다. 결국 자본과 노동의 명확한 구별이 무너지고 있는 셈인데, 양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오늘의 현실은 반(反)자본과 노동의 우위를 추구하는 (미디어)노조에게 더욱 큰 부담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산업자본은 지식·정보자본으로 이행

무엇보다 지적 생산물은 일단 생산되면 사실상 무한재생산이 가능하다. 추가생산을 하더라도 비용부담이 거의 없다. 한정된 재화에 따른 한정된 생산 때문에 근검절약을 신주단지처럼 모셔야했던 산업자본의 시대는 이렇게 세빗의 현장에서 옛날 얘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소프트웨어와 같은 지적생산물은 흔히 인터넷 등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지식공유를 위한 것이 아닌 돈을 받아내기 위한 사전포석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공동체의 이익이 아니라, 사유재산으로 지정된 지적 생산물이 언젠가는 돈다발을 한아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본가의 소망이 담겨 있다. 지적재산권 보호 규제들은 이런 비판에서 아직 자유롭지 않다.

최근 열린 세빗은 고전적인 산업자본의 시대가 지식·정보자본의 시대로 전환하는 사회 변동의 단초를 보여줬다. 지식자본의 득세는 사실상 인간과 그 정신적 능력만으로 가치가 형성되는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지배관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일지 모른다. 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의 인공지능체계 연구원인 볼프 괴링은 오늘의 IT기술을 ‘네트워크화된 절구’로 명명했었다. 이제 ‘네트워크화된 절구’는 앞으로 어떤 형태의 사회관계를 양산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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