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스나이더 감독의 <왓치맨>이 화제다. 원작 자체가 문제작이고 영화화하는데도 숱한 화제를 뿌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건 작품 자체라기보다 극중 캐릭터 중 한 명인 닥터 맨해튼의 ‘성기 노출’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들이 인터넷에 난무하고 있다. 재미있다는 평가부터 여자 친구와 같이 보다가 민망했다는 얘기까지 각양각색이다. 직접성의 출현은 대체로 거부감을 주기 마련이다. <왓치맨>의 경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판타지 장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적나라한 ‘거시기’라니! 이 자체가 상당히 상징적이다.

성기 노출이 그렇게 놀라운가

웃고 넘어갈 수 있는 해프닝이지만, 몇몇은 어떻게 문제의 장면이 심의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할 영화 중에서 <숏버스>는 주요 부위를 모자이크 처리해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에 들어갔지만 보기 좋게 ‘제한상영가’를 통보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수입사는 2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벌여서 겨우 이 판정을 철회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왓치맨> 해프닝은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규정에 대한 의구심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번 해프닝은 단순하게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라 모호한 심의규정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

손쉬운 방법은 영상물등급위원회를 ‘악’으로 규정하고 규탄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쉽게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만큼 별 성과를 낼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런 비판이 없어서 <숏버스>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사전검열의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심의규정이 모호한 까닭은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의의 문제는 항상 문화적 헤게모니 싸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금지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왓치맨>을 둘러싼 해프닝이 보여주는 것이 이것이다. <숏버스>에서 제한상영가라는 족쇄를 채웠던 그 심의가 여기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심의규정이 자의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더 근본적인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닥터 맨해튼의 ‘거시기’를 관람한 위원회는 <왓치맨>의 장면에서 어떤 유해성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공공성을 침해하는 어떤 의도도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왓치맨>은 청소년관람불가인 성인물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노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렇게 ‘보수적인’ 위원회의 판단에 대해 보인 ‘성인들’의 반응이 노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왓치맨>을 둘러싼 해프닝은 단순한 사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검열과 심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검열을 억압의 가설에 근거해서 파악한다. 다시 말해서 검열을 국가나 제도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의 문제가 불거지면 언제나 영상물등급위원회 같은 구체적인 국가장치로 책임소재를 돌린다.

금지의 당사자는 바로 우리다

물론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이 문제에 직접적인 책임을 가진 구체적인 주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앞서 말한 문화적 헤게모니 투쟁이 일어나는 ‘장’에 불과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를 폐지한다고 검열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검열과 심의의 폐지는 단순한 제도개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또는 ‘공동체’가 지속하는 한, 어떤 방식을 취하든 검열과 심의는 항상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검열과 심의의 완전철폐라는 건 유토피아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검열과 심의라는 게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금지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은 즐기라고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항상 법의 이름으로 금지를 발명해서 ‘즐길 수 없는 이유’를 들이댄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슬퍼하실 거야”라거나 “그런 짓을 마구 하면 ‘나쁜 아이’야”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선입견과 달리, 우리의 내면은 억압당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에 속박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왓치맨> 해프닝이 보여주는 건 바로 이것이다. 그 ‘금지’를 만들어내는 당사자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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