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이래 계속되는 미국의 점령자 같은 태도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는 ‘우방’ 또는 ‘동맹’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왔다. 그보다 농도가 더 짙은 ‘혈맹’이라는 어휘도 많이 쓰였지만, 이 말은 1980년대부터 사용 빈도수가 아주 낮아진 것 같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미국에 항복하고, 미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에 진주해서 그해 9월 8일 ‘미합중국 군사정부’를 세운 뒤 1948년 8월 15일에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두 나라는 실질적으로 통치자와 피지배자의 성격을 띠게 된다. 남한에 들어온 미육군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이 군정의 수뇌라면 A. V. 아놀드 소장은 실무 책임자인 군정장관이었다.

   
   
 
미군정은 3년 가까이 38도선 이남 지역을 통치하는 기간에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토대를 다진다. 먼저, 좌우익이 극렬하게 대립하던 그 시기에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고하게 해주고, 박헌영을 최고지도자로 한 좌익을 법적, 제도적으로 압박해서 불법조직 또는 ‘반미군정 정당’으로 몰아붙인다. 또한 미군정은 자문기구나 정책입안 부서에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을 중용함으로써 좌익에 맞설 교두보를 쌓는다.

친일파를 중용한 미군정

미군정이 친미· 반공주의자들에게 장차 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맡기도록 하는 것이 트루먼 행정부의 정치적 전략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미군정청은 유명한 친미주의자인 이승만을 우익의 지도자로, 정치적 기반이 약한 그를 도울 세력으로 한민당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조선사람으로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총독부 관리, 독립운동가들을 ‘사냥’하고 고문하던  일제의 경찰 같은 자들이 ‘반민특위법’의 응징을 모면하고 ‘독립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일을 맡는다. 심지어는 국군을 창설하는 일조차 나중에 그들이 주도한다.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의 민족주의 진영은 한반도에 ‘반쪽 정부’가 서는 데 반대하지만, 암살을 당하거나 역 부족으로 남북의 분단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지역에 김일성 주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래 지금까지 한민족은 61년이나 분단체제에서 살고 있다. 제2차 대전 뒤 두 동강이 난 나라 중에서 아직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민족이라는 ‘기록’을 안은 채.

미국은 남한 군정기간에 법률적 통치 주체로서 조선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데,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실질적인 지배권을 놓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소규모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한 뒤 남한을 ‘극동지역 반공의 보루’로 굳히는 정책을 펼치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자 유엔의 승인을 받아 연합군을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개입한다. 1953년 7월 27일에 미국과 북한 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한국 정부는 전시작전권마저 미국에 넘기고 아직까지도 그것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 작전권을 가진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이다. 현재 미군은 한미연합사령부의 지휘 아래 육군 2만여 명을 비롯해서 공군과 해군, 해병대까지 합치면 3만명 가까이가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은 2008년 11월 3일 현재 여군을 포함해서, 육군 61만3000여 명, 해병대 21만9000여 명, 해군 37만1000여 명, 공군 32만4000여 명에 해안경비대 4만2000여 명까지 합치면, 1백60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린 군사대국이다. 이 수치는 중국보다 훨씬 적지만 전투기, 항공모함 같은 첨단무기의 위력은 그 어떤 나라도 따를 수가 없다.

한국의 전시작전권 쥐고 있는 오바마

바로 이런 군사적 초강대국이 한국의 전시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의무적으로 참전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부터 날카로운 논쟁의  초점이 되어온 전시작전권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1991년에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서울신문> 창간 46돌 기념회견에서 “1995년까지는 평시작전권을 한국군이 넘겨받고 2000년까지는 평· 전시의 작전지휘권 모두를 한국군이 이양받는다는 것이 큰 방향”이라고 발표한 뒤 1994년 12월 1일 0시를 기해 한국 정부는 44년 만에 미군에게서 평시작전권을 환수한다. 그때까지는 부대와 병력의 이동, 주요 훈련 같은 것을 한미연합사령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2005년 10월 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군의 날 57돌 기념식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행사를 통해 스스로 한반도 안보를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자주군대로 거듭 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은 ‘북한의 남침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위험한 발상’이라고 공격하고, ‘자주국방’을 끈질기게 주장해온 진보 진영은 적극 환영한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2005년 한미안보협의회에서 전작권을 한국이 이양받기로 합의한 뒤 2006년 한미정상회담에서 그것을 확정한다. 정부가 그 시기를 2012년으로 정하고 미국에 통보하자 미국 정부가 오히려 3년을  앞당기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진영과 그들을 대변하는 언론은 소리를 높여 전작권 돌려받기를 거부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잠잠한듯이 보이던 이 문제가 2009년 2월 중순에 되살아난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2012년 4월을 목표로 추진 중인 전작권 이양을 한국 합동참모본부와 주한 미군사령부가 긴밀히 협의하면서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국방부가 ‘정책뉴스’를 통해 밝혔다고 한다. 또 합참은 전군적 추진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이미 조직 개편에 착수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어찌 된 셈인지 이런 움직임을 보고도 조선 · 중앙· 동아일보가 노무현 정부 시절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격세지감이 든다. 한국의 보수진영이  오바마 행정부의 아래와 같은 전략을 간파하고 조용히 넘어가려는 것일까?

우선, 오바마 정부는 ‘한-미 동맹’을 자신의 한반도 관련 정책의 성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기며, 미국의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태도다. 21세기 ‘한-미 동맹 미래비전’에 대해서는 여태까지보다 더 광범위한 공동 비전을 추구하는 포괄동맹을 강조하면서, 한-미 동맹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정책의 일부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과 6자 회담 참여국들에 의한 6 · 25 전쟁의 종식,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 북-미 관계 정상화 등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반테러, 에너지안보, 마약 밀거래 금지, 유행성 질병 퇴치 등 초국가적 문제들, 중국의 부상 등 여러 도전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응전하는 포괄적인 동맹의 비전이 필요하다는 태도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2009년 2월 16일자 <한겨레> ‘시론’에서).

전작권 돌려받기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오혜란 평화군축팀장은 2월 13일 “국방부 설명대로 현행 한미연합사를 한미 공동방위체계로 대체하면 대미 종속성은 오히려 심해진다. 현재 협상대로라면 전시작전통제권뿐 아니라 위기관리권과 평시작전통제권까지 미국에 넘겨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오마이뉴스> 2009년 2월 16일자).

인터넷에서는 ‘작전통제권 제대로 되찾기’ 1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은 “국방부가 작전통제권 환수를 핑계로 2020년까지 621조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첨단무기를 도입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북아 군비경쟁이 치열해지고 군사적 긴장이 높아져 한반도 평화는 멀어진다’고 전망한다.

전작권 환수의 원칙과 방침이 바른 것인지, 오바마 행정부가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합리적인 정책을 집행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이 전임자들처럼 한국을 미군의 점령지처럼 보는 오만한 자세를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인의 한이 맺힌 SOFA

2002년 초여름에 경기도 양주시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한국과 미국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해 6월 13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열네 살의 신효선과 심미순 두 여중학생이 무게 50여 톤의 미군 장갑차에 깔려 무참히 숨진 사건이 기폭제였다. 미군 제2사단 소속의  궤도차량을 운전하던 두 병사가 좁은 도로를 내려가다가 미처 그들을 보지 못하고 치었다고 미군 당국이 발표했으나, 첨단설비를 갖춘 그 차량이 바로 앞에서 브레이크만 밟았어도 그런 참사는 없었으리라는 한국인들의 주장이 터져나왔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약칭 SOFA)에 따라 미군 당국은 ‘차량의 안전한 운행을 소홀히 해서 과실치사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두 병사를  미군사법정에 세운다. 두 사람이 ‘부주의로 인한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자 우리나라 법무부는 한국 법체제에 따라 우리나라 법정에서 재판을 하게 그들의 신병을 넘기라고 주한미군사령부에 요구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 어디에서도 공무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예가 없다”며  거부한다.

*한·미 SOFA는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한 협정이다. 일반적으로 외국 군대는 주둔국의 법질서에 따라야 하지만, 미국은 해당국가와 주둔군 지위협정을 맺어 쌍방 법률의 범위 안에서 일정한 편의와 배려를 제공받는다. 예전에는 ‘한·미행정협정’이라고 불렀으나, 행정협정은 국회의 비준 없이 행정부 간의 서명만으로 발효되는 간단한 형식의 조약으로서 국회의 비준 절차를 거친 한·미 SOFA와는 다르다는 해석에 따라 ‘주둔군지위협정’으로 부르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장갑차의 두 운전병이 ‘무죄’로 석방되자,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의 열기에 가려져 있던 그 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을 끌면서 11월에 ‘촛불집회’가 열린다. 이런 집회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한때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 외교적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끝까지 평화적 시위를 함으로써 12월 19일의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보수적인 이회창 후보를 누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SOFA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터진 뒤, 남한에 다시 진주한 미군은 전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일체의 재판권을 부여받는 ‘대전협정’을 체결했는데,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순순히 동의함으로써 사법주권을 포기하는 협정이 맺어진 것이다. 그 뒤 13년 만인 1966년 7월 9일에 한국정부 대표인 외무장관과 미국정부 대표인 국무장관이 조인한 한·미 SOFA가 1967년 2월 9일 발효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는 한편, 베트남전에 파병한 대가의 일부가 SOFA였다고 전문가들이 주장한 바 있다.

SOFA는 1991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으나 한국에 불리한 규정은 별로 나아진 바가 없다. 가장 독소적인 부분은 제22조 3항으로서, ‘오로지 미국의 재산이나 안전에 대한 범죄, 또는 미군과 미군속 및 그들의 가족 내부에서 행해진 범죄, 공무집행 중의 범죄’에 대해서는 미군당국이 1차적 재판권을 갖고, ‘기타 공무 외 범죄’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1차적 재판권을 갖는다고 되어 있다.

SOFA와 관련된 미군 범죄와는 다르지만 미국이 쿠바 영토 안에서 ‘운영’해온 관타나모수용소는 근래 국제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수용소가 들어 있는 관타나모만의 미해군 기지는 1백년도 전에 미국이 차지한 땅이다. 그곳은 미국이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에 자리잡은 유일한 해군기지로서, 2002년 이래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전쟁에서 ‘적국의 전투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둔 곳이다.

이런 일은 제네바협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데도 부시 2세는 대통령으로서 공공연히 그런 조치를 취했다.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폭행과 고문을 당하거나 자살한 사건이 폭로되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이래 대통령들이 즐겨 쓰던 ‘불량 국가’(rogue state, 망나니 또는 악당의 나라라는 뜻)라는 말이 미국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는 짓이었던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한 지 이틀 뒤인 2009년 1월 22일, 1년 안에 관타나모수용소를 폐쇄하고  그의 첫 임기 안에 피수용자들이 미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가 상식과 이성을 존중하는 ‘법의 정신’에 따라 중대하고도 명백한 죄를 저지른 미군과 군속 및 가족이 한국의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SOFA를 개정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글쓴이 / 김종철

-전 동아일보사 기자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9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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