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제도는 역사적인 특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고유한 변화의 경로를 갖는다. 이 점을 감안하면, 제도 개혁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고 있는 '선진국 사례'는 좋은 '참고' 자료이지만 절대적인 참고 자료는 아니다. 그런데 선진국 사례는 과도한 의존에 그치지 않고, 아전인수격 해석을 통해 특정 주장을 밀어붙이는데 활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 언론 개혁에 대한 한국에서의 해석 논쟁이다.

프랑스 사례를 먼저 한국사회의 논의로 가져온 쪽은 프랑스가 신문방송 겸영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입법 절차를 거의 마무리한 공영 방송 광고 폐지 조치와는 달리 신문 방송 겸영에 대해서는 미디어업계가 반론을 제기하였고, 사르코지 대통령도 이를 수용하여 현재로서는 규제 완화 조치가 추진되고 있지 않다.

공영방송 광고 폐지는 마무리 단계

공영방송 광고 폐지, 신문과 방송 겸영 제한 완화를 주장하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주장과 프랑수와 코페 보고서, 그리고 다니엘 지아지 보고서에 대해서는 충분히 소개되었지만 신문 등 미디어 업계 당사자들의 주장이 담긴 미뇽 보고서에 대해서는 다소 왜곡되거나 축소되어 보도되었다. 방송 분야의 개혁 조치들은 입법 절차를 거의 마쳤지만, 신문 업계 개혁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2008년 10월2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인쇄매체를 소유한 라가르데르 그룹은 TV방송사가 없고, 민영방송인 TF1을 소유한 부이그 그룹은 인쇄매체가 없다"면서 신문-방송 겸영 필요성을 강조하고, 3개월 간 언론계 대 토론회를 요청했다. 150여 명의 언론계 전문가들이 토론에 참여하였다. 90여 가지에 이르는 이 방안은 4개 부문으로 세분화되어 지난 1월8일에 문화부 장관에게 제출되었다.

당시 프랑수와 뒤푸르 분과위원장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면서 업계의 의견을 제출했다. 68쪽 짜리 보고서의 52쪽부터 나오는 '신문과 사회와의 관계', 즉 다매체 소유 제한 규정에 대한 현황과 업계의 의견은 대통령이나 지아지 보고서의 주장과는 전혀 달랐다.

라가르데르 등 일부 예외적인 미디어그룹을 제외하고 하나 혹은 두 매체만을 소유한 프랑스 신문이 이웃 나라들의 신문보다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업계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현재의 소유제한 법령 그 자체가 거대 미디어 그룹 형성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광범위한 변경이 아니라 아주 제한적인 변경, 즉 무료신문을 포함시킴으로써 점유율 계산을 다시 하자는, 원 포인트 변경을 권했다.

다만 현재의 법령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미디어발전 관리부와 방송위원회가 소유제한규정의 기능에 대해 구체적인 해설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보고서 54쪽에서는 지방 신문과 해외 자본 유입에 대해 약간의 완화, 시장점유율 산정 시 무료신문을 포함하는 점유율 현실화를 제안했다.

   
  ▲ 정종엽 프랑스 파리 인터넷신문 <유로 포커스> 대표  
 
끝으로 현재의 소유 제한 규정이 미치는 영향, 즉 이 규정을 없앨 경우 일어날 변화와 다양성 감소 등 이 규정이 미치는 범위를 연구하라고 권고했다.

투명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 필수적

신문 시장이 더 활성화된 영국에 비해 수준 높은 분석 기사와 정부나 소유주에 대한 독립성을 포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프랑스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신방 겸영 주장에 대한 업계의 의견은 분명했다. 대규모 미디어 그룹의 경쟁력보다 기사 수준을 높이고 공익성을 더 강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르코지 정부가 대규모 공적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고, 투명하고 깊이 있는 토론을 지켜보던 국민들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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