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중앙일보를 비롯한 보수신문의 촛불집회 관련 보도를 비판했다가 석 달여 뒤 회사로부터 재계약 거부를 통보 받아 해직된 이여영 전 중앙일보 기자가 또 다른 해직기자를 비롯해 사람맛이 나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그의 여정은 우리사회 무명의 지킴이에서 잘못 알려진 유명인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한줄기 희망을 찾을 때까지./편집자

   
   
 
해직 언론인의 역사를 1974년 동아사태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언론 산업 종사자들조차도 그렇다. 동아일보의 사주가 기자를 대거 해고했던 것이 동아사태다. 그 배경에는 이 신문 광고주에 압력을 가했던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유신 정부와 맞서려고 했던 기자들이 엉뚱하게도 사주와 싸우게 된 것이 동아사태였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해직 기자들은 없을까? 해직 언론인을 양산했던 시대가 궁금해졌다. 그 답을 찾다가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이른바 ‘잊혀진 해직 언론인’의 일원이다. 양동표(梁東彪·64)씨를 만난 건, 지난달 말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가 한창이던 KBS 앞의 한 식당에서였다. 공식 직함은 국제적인 회계법인인 딜로이트앤투쉬의 고문. 이 회사의 서울사무소 대표로 있다, 올해 은퇴하고 고문역을 맡고 있다고 했다. 첫인상은, 명함에 새긴 직업(회계사·세무사)에 대한 선입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실하고 온화하지만 까다롭고 지루한 면도 약간은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외모의 어디에, 고난의 개인사를 숨기고 있을까? 언제, 왜 그만두었느냐고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동아사태 나기 한 1년 반 전쯤이었지. 유신이 발표된 이듬해니까 1973년. 동아방송 PD로 입사해, 방송뉴스부 기자를 하고 있었지. 유신 후에는 기자실이 다 폐쇄됐고 기사도 다 검열을 받았어. 기사 때문에 검열관이나 정보기관 사람들한테 뺨도 맞던 시절이야.” 옛일을 회고하던 양씨의 얼굴이 약간 상기됐다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료들하고 술 마시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 이런 상황에서 기자 생활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 그래서 몇 사람이 같이 그만두기로 했지.”

사표가 독재정권과 그에 영합하는 사주에 대한 유일한 저항 수단이었던 시대. 자의로 ‘해직’을 선택한 후 아프고 시렸을 그의 삶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2년여의 낭인 생활’이란 말로 간단히 정리해버린다. 대신 그를 잘 아는 선배가 이력을 귀띔해준다. 한국에 나와 있던 미국의 평화봉사단원(Peace Corps)들을 대상으로 우리말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동아사태가 나고 나서는 해직 기자들과 함께 어울렸다. 등사판 신문을 만들어 돌렸다. 동료들 가운데 몇은 정보기관에 붙들려 가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75년말 돌연 미국행을 결정했다. “가정을 책임 진 사람으로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 제대로 민주화 운동 하려면 잡혀가서 갇혀 있든지.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소주나 마시고 울분을 터트리고 있으려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지. 유신 체제도 얼마 안 갈테니까 미국 가서 공부나 하고 오자고.” 양씨의 말이다. 미국에서 굳이 저널리즘 석사 과정을 선택한 것도, 언젠가는 기자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다가 언론인의 꿈을 버리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 “어느 날 미국인 교수가 불러. 갔더니 학교(텍사스대오스틴교)에까지 우리 중앙정보부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가 전달된 거야. 교수 말이, 한국에서 도대체 뭘 했길래 이런 것까지 오냐는 거야. 귀국하면 잡혀갈 판인 거야.”

   
   
 
70년대 후반 접어들면서 서울의 상황이 점점 악화된 것이 그를 미국에 눌러 앉혔다. 천직이라고 여겼던 기자 대신 선택한 길이 회계사였다. 같은 대학원 비즈니스스쿨에서 세법을 전공한 후 딜로이투앤투쉬사에 입사했다. 기자로서 순탄치 않았던 경력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9년 만에 본사 파트너로 승진할 만큼 탄탄대로를 걸었다.

   
  ▲ 이여영 프리랜스 기자  
 
7년 전 서울사무소를 자청해 귀국한 그에게 요즘의 언론 상황을 물었다. “난 요즘 방송사들이 왜 파업하는지도 잘 몰라. 언론계에 관심을 둬 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뭐 대통령을 국민들이 뽑긴 하니까.” 자의반타의반 기자직을 버린 후 애써 언론에 대한 관심을 꺼버린 듯했다. 그래도 기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회한이 남아 있지 않을까?

“난 고등학교 문학 소년 시절부터 줄곧 글을 쓰고 싶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자 아니면 소설가뿐이라고 생각했어. 소설가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서 기자가 된 건데. 독재 정부에서 그걸 못하게 만드니까….” 그가 말끝을 흐렸다. 인터뷰 내내 담담하던 그도 잠깐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그래도 궁핍한 삶을 강요받았던 다른 해직 언론인들보다야 낫지 않느냐고 하려던 말을, 끝내 참고야 말았다. 꿈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궁핍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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