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라쇼몽(羅生門·1950)'은 '진실의 상대성'이란 철학적 주제를 다룬 영화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관계된 증인 네 명의 진술들이 모두 엇갈리면서 결국 사건의 실체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엔 회상을 의미하는 '플래시백'이 전체 장면의 절반에 가깝다. 영화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제가끔 다른 '해석적 기억'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기억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아닌 게 아니라, 거짓 증언은 의식 가능한 이기심뿐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조작된 기억(마치 꿈처럼!) 탓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미 UC어바인대 교수)는 "기억은 실제 일어난 진실의 뼈대에 살을 붙여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와 왜곡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올해 6월 국내에 번역·출간된 자신의 저서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에서다.

13일 밤 11시10분 방송되는 SBS TV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하나의 사건 서로 다른 목격-기억이 당신을 속이고 있다' 편(사진)은 공교롭게도 책 출간 시기와 겹쳐 일어난 인천 강화도 모녀 살해 사건 관련 수사가 당시 난항을 거듭했던 이유 중 하나인 '엇갈린 목격자들의 진술'을 소재로 삼았다.

   
  ▲ ⓒSBS  
 
지난 6월17일 오후 윤아무개(47·여)씨가 강화군 강화읍의 한 은행에서 예금액 중 일부인 1억 원을 현금으로 인출한 뒤 딸 김아무개(16)양과 함께 연락이 끊겼다. 경찰 수사가 실종과 납치 사이를 오가며 답보 상태에 빠져 들 때쯤 모녀가 해변 갈대밭에서 시신으로 발견됨에 따라 수사는 살해 사건으로 급반전됐다.

50대 남자, 50대 여자, 20대 남자 등을 보았다는 수많은 목격 증언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수사의 방향을 쥐고 흔든 증언들이 혼선만 빚게 했던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물적 증거가 없는 한 목격자의 증언이 형사 사건을 좌지우지한다. 수사 과정에서 다양한 증언들이 나오고 그 중 일관성 있고 정황에 맞는 게 법적 증거로 채택된다. 그러나 프로그램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우리가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는 기억들이 사실은 여러 과정을 통해 재구성된 이야기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것이지 사진에 찍힌 것과 같은 모습은 아니라는 얘기다.

프로그램은 강화도 모녀 살해 사건의 여러 증언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보고 엇갈린 진술 속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보고 이를 토대로 "우리의 기억이 조작된다"고 주장한다. 방송에 따르면 목격 진술에서 문제가 되는 건 자신은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존재치 않는 '거짓기억(false memory)'의 경우다.

실제 경험을 왜곡하거나 상상한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착각하는 것 등이 거짓기억의 원인이다. 프로그램은 "다른 시기에 일어난 일을 같은 시기의 것으로 혼동하거나 꿈에서 본 것을 실재라고 믿어 기억이 변형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억은 인지될 때부터 불완전한 데다 그 기억을 갖고 있는 동안 변형이 계속 일어나며, 끄집어 낼 때도 변화된다"며 "누구든 그 과정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억에 확신을 갖고 결정적인 증언을 할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환기시킨다.

프로그램은 시청자들과 함께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변형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심리 실험을 통해 기억의 미스터리를 풀어보고, 타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짓기억의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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