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끝났다. 이런 경기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동들을 느낀다. 극치의 즐거움이다. 아파트라는 특이한 주거양식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는 평소에 무관심했던 이웃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매개이기도 하다. 이번 야구 결승전을 상기해보라. 쿠바를 상대로 한국의 국가대표팀이 승리를 거두자 아파트가 떠나갈 듯이 함성이 울리지 않았던가. 이 함성은 일견 정치적인 분파도, 경제적인 계급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정치적인 입장을 단번에 초월해서 스포츠에 열광하는 대중의 모습은 정치적인 좌파들에게 상당히 곤혹스러운 광경이다. 좌파들에게 스포츠는 정치를 비정치화시켜서 대중에게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망각시키는 환각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문화연구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문화연구에 이르면 우민화나 탈정치화의 표상처럼 보였던 대중문화가 돌연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는 헤게모니의 장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대중문화는 헤게모니 쟁투의 장

어떻게 생각하면 문화연구라는 건 정치적 좌파들의 실험이 실패했기 때문에 출몰한 징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1960년대 이후 전후 경제의 풍요를 바탕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한 대중문화의 위력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했기 때문에 제안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 문화연구는 정치적 기획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을 주요 임무로 생각했다.

한국의 경우는 상황이 점점 이전과 다른 차원으로 변하고 있다.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지만 그 계급이 전혀 정치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과 강북을 편 갈라서 이 둘을 계급적인 문제로 바라보던 간편한 관점도 이제는 별반 설득력을 잃었다. 강북은 ‘또 다른’ 강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수록 한국의 정치적 좌파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도 그렇다. 올림픽 기간 동안 정치는 잠깐 휴가를 간 것처럼 보였다. 이랜드나 기륭전자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시청 앞에서도 계속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냥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니 이 틈을 타서 정부는 엄정한 법 집행을 강조하면서 강경대책을 내놓았다. 이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확실히 스포츠는 민주주의에 불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중이 박태환과 장미란을 보면서 열광하는 심정이나 여자 핸드볼 팀의 좌절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정서는 지난 촛불집회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그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건전한 시민 의식’인 것이고 상식인 것이다.

관점을 바꿔서 보면, 대중의 욕망은 언제나 그렇게 있었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입장들이 욕망의 지형도를 각자의 입맛에 맞춰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계급을 떠나 스포츠를 통해 자기 자신과 집단을 일치시키는 행위는 형이상학적인 처소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 현실을 잠깐 망각할 수 있는 법열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대중은 현실의 모순이 강제하는 상처들을 상상적인 차원에서나마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대중문화가 종교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애가 자칫 국가와 권력 동일시

올림픽 경기와 같은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민족’을 재현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스포츠 경기가 제공하는 박진감과 몰입성은 추상적으로 잠복해 있던 민족을 국가의 이름으로 호명한다. 이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숭고대상은 국가라는 육체로 현신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거꾸로 달린 태극기나마 열심히 흔들고, 한승수 총리가 이례적으로 올림픽 대표 팀 해단식에 참여한 이유일 것이다. 이런 정치인들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국가와 현 정권을 동일시하게 만들어서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것인 양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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