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6월 대한민국에 벌어지는 일들을 예측한 사람이 있을까.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헌법 제1조’를 부르고 ‘조중동 반대’를 외치는 상황은 자체로 연구 대상이다.

민주화 20년, 평화적 정권교체 10년의 세월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2007년 12월19일 대통령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국민 여론은 정권을 교체시켜 줬으니 지난 정부의 잘못은 되돌리고 잘한 점은 이어받으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냈다. 

이명박 정부가 취임 100일 만에 위기국면으로 내몰린 가장 큰 이유는 민주적 가치가 무너지는 현실 때문이다. 노무현 시대에는 대통령을 마음껏 비판하고 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국민의 비판에는 악담과 저주만 있던 것은 아니다.

   
  ▲ 중앙선데이가 지난 22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중앙선데이  
 
무너진 민주적 가치, 이명박 정부 위기의 본질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국민의 바람과 기대, 아쉬움이 분출될 수 있는 것도 한국사회가 한 단계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부동산 값 폭등, 비정규직 확산, 사회 양극화 심화 등 참여정부가 남긴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지만 권위주의 시대를 타파하려는 노력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일성으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행동에는 권위주의 시대의 병폐가 되살아나고 있다. 찬찬히 들여다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9일 특별 기자회견을 열고 ‘뼈저린 반성’을 얘기했다.

국민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았다는 반성의 의미였다. 주요 방송 생중계를 지켜본 국민 중 일부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 변화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한 변화는 끝 모르게 떨어지던 국정운영 지지도에 미세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명박 정부 달라지지 않은 '독선'

그러나 국민의 마음은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 ‘진정성’을 얘기한다고 마음으로 그것을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뽑힌 대통령이 취임 100일 만에 퇴진 압력을 받고 실제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40%가 물러나야 한다고 응답하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돌리려면 이명박 정부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말로 ‘뼈저린 반성’을 하면서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노력이 선행돼야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뼈저린 반성’을 얘기한 지 일주일도 안돼 그러한 주장은 ‘눈속임’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 부산 MBC의 지난 21~22일 여론조사 결과. ⓒ부산 MBC  
 
이명박 정부는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오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이 더 부각됐다. 촛불 민심을 경청한다고 해놓고 촛불 참가자를 향해 빨간색 덧칠을 하는 구태를 보이고 있다. 청와대가 진두지휘하고 여당과 법무부 검찰 경찰이 움직이고 일부 보수신문이 여론몰이에 나서는 모습은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을 연상하게 한다.

경향신문 "대통령이 국민 겁박하나"

이명박 대통령은 24일 국무회의에서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의도로 이런 얘기를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검찰과 경찰은 인터넷상에서 대통령에 비판적인 여론을 향해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다. 여당 지도부는 촛불 참가자를 프로 시위 꾼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통령 주도 공안정국을 언론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경향신문은 25일자 <이명박 대통령, 국민을 겁박하나>라는 사설에서 “독재정권 시대의 이념적 편 가르기를 통한 국면 돌파 방식을 연상케 한다. 이는 국민을 겁박하는 것”이라며 “이 대통령의 발언은 '뼈저린 자성'이 한창 타오르던 촛불을 일시 모면하기 위한 수사였다는 심증을 더욱 굳혔다”고 주장했다.

국정운영은 게임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을 상대로 포커 게임을 하고 싶은가. 표정으로 적당히 상대를 속이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국민도 대통령을 상대로 '한판 대결'을 벌여달라는 말인가. 국민을 상대로 싸워서 이긴 정권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왜 모르고 있는가.

이명박 정부 26일 관보 게재하나

이명박 정부는 미국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을 담은 고시를 26일 관보에 게재할 것으로 보인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비판여론을 의식하지 않는 일사천리 행보이다. 중앙일보가 여론조사로 도와주고 동아일보도 측면지원에 나서고 한나라당 싱크탱크까지 ‘여론조사 정치’에 동참한 것을 보며 자신감을 얻은 것인가.

   
  ▲ 지난 1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 특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이명박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도가 30%를 돌파했다고 밝혔던 당일 부산 MBC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정지지도가 15%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물론 조사 주체나 기법의 차이에 따라 지지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표를 몰아줬던 지역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비판의견이 여전하다는 상황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여론조사에 담긴 ‘숫자의 마술’에 국정운영의 방향을 결정하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선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론조사 수치가 잠시 기분을 풀어줄지 모르지만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끄는 ‘덫’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