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9일 "아무리 시급한 국가적 현안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국민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챙겨봤어야 했는데 저와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특별 기자회견에서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10일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며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다"고 했다.

대선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 추진과 관련해선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청와대 비서진은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대폭 개편하고, 내각도 개편하겠다"면서 "다만 내각은 국회가 열리는 것을 봐서 조속히 (개편)하겠다"고 했다.

또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 "지금 협상이 진행 중이나 미국이 30개월령 이하 쇠고기 수입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고시를 보류하고 수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민의 뜻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부연했다.

화물연대가 19일 컨테이너운송사업자협의회(CTCA)와의 운송료 협상에 합의하고 집단 운송거부를 철회했다는 소식과 한·미 양국 정부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고 미 정부 보증의 시효 등 세부사항을 두고 막바지 협의 중이라는 소식, 20일 발표될 청와대 수석비서관 인선안에 대한 관측 등이 1면의 주요기사로 다뤄졌다.

아래는 20일자 주요 아침신문들의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미(美)에 끌려다닌 이(李)정부/ "알맹이가 없는 말잔치">
국민일보 <"청와대 뒷산서 촛불보며 자책">
동아일보 <"30개월미만 보장없으면 수입안해">
서울신문 <"미(美)정부 보장없으면 수입 않겠다">
세계일보 <"국가현안 민심 못챙겨 뼈저린 반성/ '30개월 미만 소' 무산땐 고시 보류">
조선일보 <"촛불행렬 보며 뼈저린 반성">
중앙일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
한겨레 <협상도 끝나기 전에…또 졸속 민심수습책>
한국일보 <"뼈저린 반성…새로 시작 하겠다">

대통령 발언 옮기기보다 평가한 경향·한겨레

아침신문들의 1면 머리기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 기자회견 관련 소식 일색이다. 망설임의 여지가 없다. 또 대부분 신문들은 대통령의 발언을 추린 스트레이트 기사를 1면 머리로 올리고 제가끔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언급 내용에 따옴표를 쳐서 표제로 삼았다. 하지만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회견 내용에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봐선지 대통령 언급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맥락을 짚는 데 주력했으며, 때문에 머리기사 제목에도 각 신문사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겼다.

   
  ▲ 경향신문 6월20일자 1면.  
 
1면 머리기사만 놓고 보면 대통령이 한 '뼈저린 반성'이란 표현이 기사 제목에 가장 많이 활용됐다. 자책의 계기는 대통령이 지난 10일 청와대 뒷산에 올라 바라본 '끝없이 이어진 촛불 행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바람을 잘 챙기지 못한 탓에 국민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했다는 게 반성의 내용이다.

   
  ▲ 한겨레 6월20일자 1면.  
 
엇갈린 만평들…조선 "대통령 사과에 시위꾼들 촛불 꺼질까 전전긍긍"

만평들을 견줘보면 재미있다.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의 만평은 두 신문사의 극명한 인식 차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일보 신경무 화백은 만평 제목을 '대통령, 국민들 앞에 무릎 꿇었다'로 뽑았다. "뼈저린 반성, 자책, 미 정부 보장 안 하면 수입고시 무기 연기…." 대통령은 엄청난 일을 한 셈이다. 먹거리를 걱정하는 순수 '촛불'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표정으로 봐선 촛불을 이젠 끌 태세다. 그러자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전문 '꾼'들은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한다. 촛불 편승 세력은 대통령의 진심이 담긴 사과 한마디에 제압될 일만 남았다. 국민들은 이제 촛불집회를 접고 생업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6월20일자 A2면 '조선만평'.  
 
경향신문 3면의 만평 코너 '김용민의 그림마당'을 보면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뼈저린 반성'이란 사과를 던지지만 "그런데 재협상은 없어! 미국 정부를 믿어봐!"라고 한다. 말로 반성은 하지만 입장엔 변한 게 없다는 얘기다. 국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한다. 이게 뭔가 싶은 것이다.

   
  ▲ 경향신문 6월20일자 3면 '김용민의 그림마당'.  
 
만평 바로 옆에 배치된 기사 제목은 <"뼈저린 반성"…정책기조는 그대로 강행>이다. 기사는 대통령이 '뼈저린 반성', '자책' 등의 표현을 써가며 사과의 수위를 높였지만 "이날 특별회견으로 등돌린 민심이 돌아오고, 이 대통령이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지는 불투명하다. '말'로서 사과를 했지만 쇠고기 재협상 불가라는 입장에서는 한 발도 나아간 게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5면에 통단으로 <'결단' 없이 일방적 이해 구하기…소통은 멀었다>를 싣고 '이 대통령의 잘못된 시국 인식'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회견은 경제 위기를 강조하고 그 바탕에 '쇠고기 재협상 불가', '한·미관계 최우선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불가피성' 등의 논리를 펴는 데 무게를 뒀다. 촛불민심과는 현격한 거리를 보였다는 평가"라고 기사는 짚었다.

국민일보 만평은 감각적이다. 인기를 끌고 있는 TV CF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남자가 말한다. "사랑도 할부가 되나?" 여자가 의아해 하자 남자는 "아, 아니, 만약에, 할 수 있다면 5년 할부로 너랑 살고 싶어서…"라고 '재치 있는' 멘트를 던진다. 여자는 묻는다. "그런데 너 그런 카드 있어?" 물론 있다. 'BB카드'다. 'BB'는 '뼈저린 반성'의 영문 이니셜을 따와 비꽈서 만든 말이다. 남자는 대통령, 여자는 '민심'이다. 과연 '뼈저린 반성'이란 '뻔한' 사과 멘트는 문책을 유예하고 신뢰를 담보하는 신용카드일까.

   
  ▲ 국민일보 6월20일자 2면 '국민만평'.  
 
국민이 반성해야 한다. 정치인은 국민의 거울이나 마찬가지다. 비단 대통령뿐만이 아니지 않나. 이 같은 뻔한 레토릭을 구사하면서도 정치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되레 그게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경향·한겨레 "조급증 드러내"…동아 "반대 여론에 결국"

대통령의 사과를 평가하는 시각은 신문들마다 짐작하는 대로다. 경향신문은 1면 머리기사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두고 "'쇠고기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치·외교적 미숙함과 조급증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기사는 "특히 '미국 정부가 (안전을) 보장한다면 믿어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의 양보와 선처에만 의존하고 있고, 우리 국민의 건강권을 미국이 쥐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라며 대통령의 안이한 인식을 질타했다.

기사는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을 보며 자책했다는 말이 무색한 알맹이 없는 담화였다"며 "촛불의 수만 늘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경고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기자회견 내용을 대통령의 회견 소식과 나란히 1면에 실었다.

   
  ▲ 경향신문 6월20일자 5면.  
 
이 신문은 대통령 회견과 관련, 3면 통단 기사 <타결 전에 "담화→회견"…협상기본 안된 청(靑)>, 4면 통단 기사 <"30개월 이하 미(美) 정부보증, 부시에 직접 요구">, 5면 통단 기사, 6면 머리기사 <"아전인수식 해석…진정성 없다"> 등을 실었다. 회견 방식, 내용 등이 모두 비판거리다.

한겨레도 1면 머리기사에서 "미국에서 협상이 종결되기도 전에 기자회견을 하다보니, 이 대통령이 이날 내놓은 쇠고기 대책은 공허한 주장의 반복에 그쳤다"고 비판했다. 또 "쇠고기 정국에서 하루빨리 탈피하고 싶다는 조급증만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3면 통단기사 제목은 <고개는 숙였지만 '국민들 요구'와 동떨어져>이며 5면 통단 기사 <"달라진 게 없다" "믿으라는 말만 되풀이" 실망>는 네티즌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반응을 묶어서 전했다.

   
  ▲ 한겨레 6월20일자 5면.  
 
이에 반해 동아일보는 A3면 통단 머리기사에 <반대 여론에 결국…대선 핵심공약 대운하 사실상 포기>란 제목을 달아 이 신문이 줄곧 주장해온 '인터넷 괴담'론에 핵심 대선공약까지 무산돼 안타깝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 신문은 또 정치권이 "진정성이 느껴지는 회견"(한나라당), "뼈저린 반성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대안이 부족했다"(통합민주당) 등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했다. 경향신문·한겨레가 전한 것과는 방점이 다르다.

"청와대 뒷산서 끝없는 촛불 보니" 표현, 표절?

한겨레는 5면 하단의 3단 기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19일 특별 기자회견 서두에 밝힌 '청와대 뒷산에서 바라본 촛불집회'가 누리꾼들에 의해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고 전해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이 지난 6월10일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집회를 바라보며 착잡했던 심경을 피력한 내용이, 지난 2004년 탄핵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똑같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집회를 바라보던 상황과 흡사하다는 게 네티즌들의 주장이다.

기사는 하지만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이 바라본 '촛불집회'의 성격은 정반대"라며 "이 대통령은 '쇠고기 협상'의 잘못에 대한 불만의 것인 데 비해, 노 전 대통령의 경우는 한나라당이 주도한 탄핵에 반대해 노 전 대통령을 변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기자회견문의 초안을 잡은 김두우 정무2비서관은 "뒷산에 올라가 촛불을 바라봤다는 부분은 이 대통령이 밝힌 부분"이라며 '표절 의혹'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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