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미 1980년부터 시작됐다. 미국은 그 해 5월, 전두환 군사정부의 광주 무력 진압을 승인한 대가로 시장 개방을 끌어냈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를 한국에 이식시키는데 성공했다. 전두환은 광주민중항쟁 직후 미국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원자력발전소와 서울지하철공사 등의 알짜배기 사업을 넘겨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가 23일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주최 국제학술대회에서 밝힌 충격적인 사실이다.

'신좌파의 상상력'의 저자인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한 것은 박정희가 추진해 왔던 중앙집권식 발전 모델을 종식시키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3600페이지에 이르는 미국 의회 속기록과 정부 문서 등을 확인한 결과 미국은 철처히 자국의 이해에 따라 전두환 군부의 광주 무력 진압을 승인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가 공개한 미국 정부 문건 가운데 일부. 이 문건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집에도 포함돼 있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그 의미를 제대로 짚지 못했다. 이 문건에서 윌리엄 글레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는 백악관에 보낸 편지인데 "안보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경제적 상업적 속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가 이날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백악관은 5월22일 긴급 회의를 열고 무력 진압을 허락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존 무어 미국 수출입은행장을 한국에 보내 원자력발전소와 서울지하철공사 사업 등을 미국이 수주할 수 있도록 요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윌리엄 글레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는 이에 앞서 백악관에 보낸 편지에서 "한국은 13번째 무역 상대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안보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경제적 상업적 속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또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위임받는 것은 미국의 외교 정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레이스틴은 광주에서 무력 진압이 끝난 뒤인 5월30일,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펴내는 잡지, '내셔널비즈니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 나라의 경제 성장에 다음 중요한 단계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넘어 시장의 힘을 신뢰하는 경제 자유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위협과 내부 혼란을 무력 진압의 명분으로 삼았지만 공개된 문서들은 미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북한에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 공식 문서에는 "두 번째 이란을 막아야 한다"거나 "한국이 또 다른 베트남이 될 수 있다"는 등의 표현이 눈에 띄지만 내부 문건에는 "북한이 미국에 관계 개선을 희망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등 전쟁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미국은 전쟁의 위협이 미국 자본의 침투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전두환에게 사업하기에 좋은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투자자들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전두환은 6월13일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회원들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와 3M, 다우케미컬, 걸프오일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독재를 인정받는 대가로 미국 정부와 기업들의 이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는 이야기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전두환과 미국의 유착을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 학파의 이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과 비교했다. 학계에서는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어거스트 하이예크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던 1974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 칠레는 1975년부터 신자유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1979년에는 미국과 영국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시작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였던 셈이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전두환은 미국 비즈니스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적극 기용했는데 이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1983년 전두환 정부는 외국인 투자 유치법을 개정하고 자본의 대외 유출을 금지하는 모든 제약을 폐지했다. 1977~1981년 사이 한국의 외국인 투자는 5억달러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1985년까지 해마다 두배 이상 뛰어올랐다. 대외 부채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1980년 272억달러에서 1985년에는 468억달러까지 늘어났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멕시코에 이어 세계 최대의 부채국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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