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어느 나라보다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언론도 유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 피의자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 영국에 최근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타블로이드판 일간지 ‘데일리 메일’지가 지난 2월초 젊은이 다섯명의 사진과 이름을 담은 기사와 함께 ‘살인자들’이라는 제목을 달아 1면에 내보낸 것이다.

이어 “메일은 이 사람들을 살인자로 고소한다. 만약 우리가 틀렸다면 우리를 고소하라”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영국 사회는 피의자 무죄추정 원칙과 언론의 일반적 책임을 저버린 ‘데일리 메일’을 일시에 주목했고 뉴욕타임즈는 이 사건을 19일자 신문 1면에 실어 또 한번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번 보도 파문은 지난 93년 10월 22일 밤 10시 30분께 다섯명의 백인 젊은이들이 18살 먹은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소년 스테판 로렌스를 “껌둥이”라고 소리지르면서 칼로 찔러 죽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에 실린 다섯명은 인종차별주의자들로 사건 발생후 피의자로 고소됐으나 이들 중 2명은 93년에, 나머지 3명은 지난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경찰은 이에 앞서 법정에서 증언할 만한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몇 년 동안 영국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던 이 사건이 지난 2월초 재심에 회부됐다. 이번에도 무죄판결. 법정에 출두한 피의자들은 묵비권 행사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윙크로 이름 부르는 것에 대답하거나 키득거리며 여유를 보이다 재판이 끝나기 무섭게 세단을 타고 사라졌다.

‘데일리 메일’은 이같은 법정의 판결에 도전장을 냈다.

데일리 메일은 사건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조차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는 경찰의 무책임한 조사태도를 비난하면서 이들 5명의 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데일리 메일의 보도는 파문을 일으키기기에 충분하다. 언론이 무죄판결을 받은 피고인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무엇보다 피의자 보호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제기되고 있다. 영국은 뉴욕타임즈가 지난 18일자 1면에 보도한대로 “언론에 대한 공적 기밀보호와 명예훼손 적용이 미국보다 훨씬 엄격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정황때문에 뉴욕타임즈는 이번 데일리 메일의 보도가 더욱 놀랍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과 법정을 비난하는 인권단체와 반인종차별주의 단체들은 최근 인종차별주의적 범죄의 위험성이 높아져 가고 있다며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다. 사회 각층은 데일리 메일이 평소 인종차별주의나 인권 문제를 꾸준히 다뤄온 신문이 아니었던 점을 들어 더욱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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