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8일자로 나온 <한겨레 21> 707호를 뒤적이다가 ‘출판 인터뷰’에서 잠깐 멈췄다.

‘선비의 육아일기’라는 책을 쓴 김찬웅 씨와 유현산 기자가 대화한 내용이다. 책은 이문건이라는 조선 선비가 손자를 키우면서 쓴 육아일기 <양화록>을 풀어쓴 것이다. 기사 첫 머리에 이 선비의 일생이 요약되어 있다. “이문건은 1494년 명문 사대부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둘째형이 사약을 받았다. 6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1545년엔 을사사화에 휘말렸다…. 그는 경북 성주로 귀양을 떠났다. 23년 동안 유배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이렇게 기구한 선비는 손자를 열심히 훈육했다. “이문건의 마음을 이어받은 손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싸웠고 나라가 상을 내리려 하자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며 거절했다. 할아버지의 육아일기는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그럼 이문건의 육아는 성공한 거네요?” “그렇죠.””

가문을 박살내고 조카의 시체를 찢어서 들판에 버린 나라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은 채 손자를 올곧게 키워 또다시 나라에 바친 할아버지. 도대체 그들을 그렇게 만든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특검이 낯간지러운 수사에 이은 소사스러운 수사학으로 막을 내릴 무렵, 서울 지하철 3호선 화정 전철역에서 어떤 노인이 큰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김용철 이 놈은 어떻게 된 거야. 삼성을 들쑤셔서 국가경제를 얼마나 말아먹으려고... 이 자식 xx도 놈이지.” 근처에 있던 다른 노인의 타이름에 ‘당신 몇 살이냐’로 맞대응하던 그는 조금 지나서 수그러들었다.

이건희 회장의 선친이 만들어둔 삼성의 경영이념에 사업보국(事業報國)이 들어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노인은 아들 이건희가 떼어먹은 어마어마한 세금이 국가의 부를 거덜 낸 것이며, 따지고 들면 ‘대한민국’의 경계선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의 주머니 돈을 털어 간 것임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 노인에게 450년 전의 이문건과 비슷한 마음을 심어준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통령은 미합중국에 가서 조그만 차를 운전하고 오더니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했다 한다. 미합중국에서 생산되는 쇠고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중에서 반협박조로 해외에 판매하는 쇠고기가 어떤 것인지는 도무지 모르는 듯한 그는, 이 말 한마디로 가난한 국민들을 ‘미쳐도 좋으니 고기를 먹겠다고 환장한 인간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한우 고급화가 해법 …살지 말지는 소비자몫”이라 한다. 얼핏 보면 아니나 찬찬히 보면 말과 짓에 일관성이 있다. 그는 ‘강부자’, ‘고소영’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위해 조직한 노력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들은 입법(18대 총선 결과 진보신당은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사법, 행정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그나마 공공영역으로 남아있던 교육과 의료를 완전히 개조하려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이라는 모양새를 빌려 ‘지배계급을 위한’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일반은 아니다. 저항하다 성공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저 반란 수괴가 될 뿐이다. 차라리 나라를 위해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착실하게 먹고 죽어서 ‘호국영령’의 이름으로 국립 현충원에 묻힐 궁리를 하는 게 좋겠다. 사업보국한 이건희 곁에 묻힐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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