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 부도 사태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13일 한 종합지 편집국장은 “김영삼 정부는 한보 문제로 폭설을 맞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폭설은 치우는 것이 아니다. 눈이 다 내리도록 그냥 맞는 것이 폭설이다고 설명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한보 사태는 김 정권의 존립 문제까지 거론될 정도로 언론의 집요한 관심을 받았다. 중간 중간 황장엽 비서의 망명, 이한영씨 피살, 등소평 사망등 그 어느때보다 무게있는 뉴스가 쏟아졌지만 언론의 시선은 과거와 달리 정권 차원의 ‘의혹’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간 언론의 성역으로 여겨져오던 현철씨 문제도 마치 예전의 부진을 만회라도 하듯 정면으로 부각시켰다. 과거 대통령의 친인척 보도가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김현철씨 문제의 경우 김씨가 검찰 조사를 받게된 일차적인 공로가 언론에게 있다는 평가마저 나오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언론계 안팎에선 ‘언심(言心)이 김심(金心)을 떠났다’는 진단도 나온다. 과연 무엇이 폭설을 내리게 했는가. 언론의 ‘파이팅’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와 관련 공보처 한 관계자의 진단은 이색적이다. 그는 언론의 한보 보도를 ‘경쟁의 역작용’ 논리로 풀었다. 일부 언론사의 잇따른 특종이 기사 경쟁에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언론사에 물을 먹고 나면 더 튀게 마련인 언론의 생리”가 절대적으로 반영됐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소위 ‘특종’을 독식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언론사의 분발을 촉발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실제로 정부 일각에선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말이 가까워질수록 가속화될 것이 뻔한 언론의 대 권력 비판보도에 대한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작업도 외부에 의뢰해 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이같은 현정권에 대한 언론의 공세적인 태도는 김영삼 대통령이 당면하고 있는 임기말 현상과 무관치 않다. 이미 현 정권이 언론에 무엇을 요구하거나 보도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히려 권력을 길들이려는 시점에 와 있지 않느냐는 해석이다. 다소 비약은 있지만 한보 사태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이해하는 한 근거로 볼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다소 성급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것보다는 여느 의혹 사건과는 다른 한보 사건의 폭발성이 이러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유발했다는 시각이다. 정계와 재계, 관료사회, 금융권이 전부 결탁된 만큼 언론의 각별한 관심은 당연했다는 것이다. 특히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숱한 의혹을 파헤치기보단 정치권 ‘깃털 인사’들을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은 것이 일차적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간 일부 언론사가 김영삼정부에 갖고 있던 ‘섭섭한 감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 대통령은 집권 초기 언론인들의 재산공개를 포함해 내부적으로 언론사정 작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박관용 청와대 전 비서실장이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재산공개 등을 추진하다 언론사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무산됐다는 것이 박 전 실장의 설명이었다.

언론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도 실시했었다. 이 결과는 각 언론사에 통보됐고 결과적으로 언론사의 ‘발목’을 잡는 빌미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같은 세무조사도 이제는 ‘약발’이 서지 않는다.

자칫 언론에 ‘밉’보였다가는 권력 재창출이 힘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재벌을 끼고 있는 일부 신문사들의 경우 사주가 현 정권에 구속된 경우도 있고 모기업을 통한 우회적인 압력을 통해 기사 논지를 ‘제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일부 관계자들이 공사석에서 이들 신문의 ‘영향력’을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들 신문을 포함해 일부 언론들이 현철씨 문제가 터지자 이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주로 언론과 권력간의 관계를 감안한 분석이라면 소위 ‘정치공학적 접근’도 적지 않다. 바야흐로 대선보도가 시작됐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언론보도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됐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정보기관의 보고서에는 각 언론사주와 대선 후보주자들간의 회동 관련 정보가 요근래 부쩍 늘었다는 후문이다.

증권가에선 어느신문이 누구를 밀기로 했다는 식의 미확인 소문이 난무하고 있다. 실제로 여권은 최근 한보문제와 김현철씨 등이 불거지면서 언론의 눈을 대선으로 돌리기 위해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당정개편, 여권 후보 조기 가시화 등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이러한 정황증거들이다. 이런 점에서 한 정치부 기자의 진단은 시사적이다. 그는 “언심(言心)은 없다. 있다면 사심(私心)만이 있을 뿐이다. 권력과의 관계가 여전히 신문사의 명운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각 언론사는 이미 줄타기 시점에 와 있다”고 진단했다.

만일 어떤 언론사주가 그러한 고민이 없다면 너무 ‘순진’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한 전직 청와대 출입기자는 김영삼 정부를 6공에 비해 훨씬 비사가 많은 정권으로 규정했다. 6공이 공조직을 중심으로 정책 결정이 이루어졌다면 현 정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조직이 차지하는 비중도가 높고 그런점에서 앞으로 기사가 쏟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언론의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진단이다.

언론의 줄기차고 끈질긴 문제의식이 계속될지 아니면 일회적인 추적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소위 ‘언심’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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