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29년전인 선조 1년 음력 4월 초사흘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은 임금을 모신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했다. “임금은 항상 두려워해서 봄철 얼음을 밟듯 조심하고,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무서워해야 합니다.” 정치에 잘못이 없는가, 말을 할 때 잘못이 없는가 “근심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성위에 군림하는 절대군주에게도 그 막강한 권력은 ‘호랑이꼬리’처럼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다.

호랑이꼬리란 바로 백성이다. 기대승은 이듬해 윤6월 초엿새 경연에서 말했다. “군주는 항상 백성을 두려워하고 무섭게 여기는 마음을 지녀 잠시라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김영삼대통령이 취임 4년만에 처음으로 국민앞에서 ‘나’라고 하지않고 ‘저’라고 했다. 지난달 25일 ‘취임 4주년을 맞아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김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했다. ‘한보 비리’에 대한 사죄다.

권력이 호랑이꼬리처럼 두렵고 무섭다는 사실, 기대승이 4백29년전 제왕을 위해 깨우쳤던 그 사실을 김대통령이 깨닫는 데에는 4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 매사에 독주와 ‘깜짝쇼’를 연출해 온 김대통령으로서는 개인적으로 시인하기 어려운 ‘패배와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자칭·타칭 ‘문민정부’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민주적 정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값비싼 결론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민주’란 구호가 아니라 ‘절차’임을 확인하는 실험이 끝난 것이다.

그렇다고 김대통령이 말 그대로 사죄만 한 것은 아니다.

김대통령은 한보사태가 자신의 “부덕의 결과”라고 했다. 그것은 지난날 상감마마가 쓰던 말이다. 구체적으로 책임이 있어서가 아니라, 관대하게 도의적 책임을 지는 은총을 베푼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김대통령은 자신이 한보비리의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다. 신한국을 만들려는 노력이 “농락당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 한보비리에는 “여야의 중진 정치인이”연루돼 있다고 했다. 다수의 여당권 정치인에 덧붙여 한사람의 야당 정치인이 있다는 검찰수사결과를 잊지않았다. 그나마 이러한 비리는 “우리 사회 일각에 뿌리깊게 남아있는 부패한 정치와 정경유착의 관행”이라고 했다. 그래서 “관련자들은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단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보비리는 대통령이나 정부와는 관계가 없는 비리요, 김대통령은 사죄하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하는 자리에 서있다는 것이다. 한보비리는 정권비리가 아니라는 일관된 주장을 고수한 것이다.

김대통령이 유일하게 털어놓은 사죄의 표시는 아들 현철씨를 정치적 영향권에서 떼어놓겠다는 약속이다.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은 ‘사죄’라는 꽃다발로 장식한 한보비리 송사리잔치 해법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김대통령의 사죄는 임기만료 1년을 남기고 ‘오만하게 군림하는 문민정부’가 그 전성기를 넘겼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이었다.

4년동안 김대통령의 충성스런 ‘입’이었던 언론의 태도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다. 김대통령의 지휘봉에 따라 김대통령의 허망한 정치구호를 끊임없이 노래해온 언론의 ‘합창’은 이제 끝난 것같다. 언론은 태도를 바꿔 한보비리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를 승복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김대통령의 정치적 패배보다 더 큰 데에 있다. 파국적인 적자경제에다 천문학적인 한보비리 그리고 날치기통과에 나타난 총체적 위기현상이 그것이다. 언론은 이 위기상황에 분명히 김영삼정부와 책임을 나눠져야 할 공범의 관계에 있다. 언론이 ‘비판과 견제’라는 본연의 직무를 저버리고 권력의 충실한 ‘입’노릇을 하지않았던들 오늘의 총체적 위기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책임을 지지않는 힘-그것은 오랜 시대를 통해 창녀의 특권이었다”는 것은 영국의 시인이요 소설가인 키플링(1865~1936)의 말이었다.

창녀는 책임을 지지않는다. 그것은 바로 김영삼정부 4년동안 부끄럽고 창피스런 언론의 모습이기도 했다. 군사정권시대에도 언론이 그처럼 완벽하게 권력의 하수인노릇을 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김대통령의 패배는 권력의 입노릇을 해온 언론의 파산을 뜻한다.

언론은 참담한 심정으로 과거 4년을 되돌아 보는 최소한의 양심이 필요하다.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 “누가 창녀에게 돌을 던지랴”하는 자세로 참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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