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더 좋은 치료를 받기 원한다고 해서 이를 도덕적 해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정부가 건강보험의 포괄수가제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매일경제의 설명에 따르면 병원과 환자들의 도적적 해이를 근절하기 위해서다.

포괄수가제란 진료의 정도에 관계없이 각각의 질병마다 표준 진료비를 정해두고 이를 부담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를테면 맹장수술의 경우 배를 얼마나 꿰멨는지 또는 얼마나 오래 입원했는지 등에 관계없이 표준진료비가 정해져 있고 건강보험공단은 이 표준진료비만큼만 부담하게 된다. 이 경우 병원에서도 더 열심히 치료한다고 해서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이상의 진료를 기피하게 되고 환자 역시 비용 부담이 일부 줄어들게 된다. 항생제 사용도 줄어들게 되고 의사가 진료비를 덤터기 씌우는 과잉 진료도 막을 수 있다는 게 보건복지부의 주장이다.

지금까지는 진찰료와 행위료, 검사비, 재료비, 입원비 등으로 따로따로 계산해서 합산하는 행위별 수가제 방식이지만 포괄수가제로 바뀌면 맹장수술과 백내장 수술, 제왕절개 등에 각각 가격이 매겨지고 모든 진료행위가 표준화된다. 문제는 이런 표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다. 또한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다. 이런 획일적인 규제로는 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 매일경제 2월25일 11면.  
 
매일경제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의료 서비스의 양에 관계 없이 미리 정해진 대로 표준화된 진료비만을 병원에 지급하는 포괄수가제나 환자당 일정액을 주는 인두제 등 다양한 지불제도를 구상하고 있다. 매일경제는 "건강보험 가입자의 불필요한 의료 이용을 줄여 건강보험 재정이 새지 않도록 힘쓸 방침"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불필요한 의료 이용"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보건복지부는 연간 병원을 1천회 이상 방문한 사례를 들어 건강보험 재정이 불필요하게 새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 아닌가. 일부 언론에서는 독감 예방주사를 여러차례 맞으러 오는 노인들의 사례를 거론하기도 했다. 지나친 복지 혜택이 도덕적 해이를 부른다는 주장이다.

환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문제 삼는 것은 그야말로 치졸한 발상이다. 도대체 누가 세금을 축내기 위해 일부러 병원에 드러눕는단 말인가. 설령 지나친 호들갑이라고 할지언정 병원에서 내쫓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보건복지부는 수가제도를 다양화하는 배경으로 "질병구조가 당뇨병과 고혈압 등 만성질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현실인식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결국 가벼운 질환에 대해 보장을 하지 않거나 보장을 줄이겠다는 이야기다. 가벼운 질환에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저소득 계층을 배려하지 않는 발상이기도 하다.

건강보험의 재정 건전화도 시급한 과제지만 무작정 진료비를 절감하는 것이 최선의 해법은 될 수 없다. 고령화에 따라 의료비 지출 증가와 건강보험의 재정 적자, 정부의 보전과 세수 부담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은 필연적이다. 저소득 계층에게는 오히려 보험료를 더 내는 것이 진료비를 부담하는 것보다 유리할 수 있다. 그런데 매일경제를 비롯해 보수·경제지들은 병원과 환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문제 삼으면서 포괄적 수가제나 인두제 등을 대안으로 들고 나온다. 가벼운 질병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자는 건강보험의 근간을 뒤흔드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와 매일경제 등의 주장은 이수창 삼성생명 사장이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간담회에서 했던 발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사장은 이 자리에서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본인 부담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그러면 건강보험 재정도 건전화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장은 건강보험을 축소하고 본인 부담을 늘리는 대신 민영 의료보험을 활성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건복지부와 매일경제 등은 간과하고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일부 병원과 환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기존의 건강보험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령화와 양극화에 있다. 항생제의 남용이나 과잉 진료도 막아야겠지만 근본적으로 급증하는 의료비를 사회적으로 누가 부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증 질환에 대한 보장 범위를 넓히는 것 못지 않게 의료 사각 지대를 축소하려는 노력도 절실하다.

우리나라 공공보험의 보장성이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나라들 평균인 70%대에 훨씬 못 미치는 50%대에 머물러 있고, 본인부담률도 40%대에 육박해 OECD 나라들 가운데 멕시코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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