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통령직 인수(引受)위원회인지 국민에게 인내심을 닦게 하는 인수(忍修)위원회인지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다.

시끄럽다가 드디어 아주 기발한 발상을 내놓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영어 교육에 관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정확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것에 대해 한마디 보탤 마음은 없다. 나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라는 책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번역이 앞선 나라다. 그러면 왜 이렇게 번역을 열심히 하는 걸까? 이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해보겠다.

1800년대 후반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라는 사람이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바바 다쓰이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 일본은 ‘번역주의’라는 입장을 택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뭐든지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을 하면 뭐가 좋은가. 자기네 나라말로 편하게 읽으니까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번역이 습관되면 그것은 단순히 문헌번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문물 전반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것으로 ‘번역’하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번역주의는 세월의 두께를 얻으면서 서구의 근대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게 한 정신적 바탕이 된다. 이것이 사실 오늘날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힘일 것이다.

이런 번역의 성과가 잘 드러난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이다. 우선 이 책 뒤에는 1910년대 이후 일본에서 출간된 ‘신곡’ 완역본 목록이 나와있는데 15종이 넘는다. 이 책은 15회에 걸친 이마미치 교수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엔젤 재단이 개최한 이 강연은 끝난 후 매회 바이올린 연주와 다과회를 함께 열었으며, 단테와 관련있는 이탈리아 포도주도 마셨다고 한다. 청중석에는 학계의 인사나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쇼와 전공 주식회사 최고고문과 같은 이도 참여했다. 비디오 촬영과 강의 녹음은 후지제록스 종합연구소가 담당했으며, 그것에 후지제록스의 회장과 사장이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책이 출간된 경위를 적은 저자 후기를 읽다보면 부럽다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이마미치 교수의 이 강연은 일본이 학문에 있어서도 이미 선진국에 올라섰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고대 희랍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서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청강자들은 알아듣는 외국어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다양한 종류의 일본어 번역본들을 놓고 필요에 따라 골라가며 읽는다.

전문 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해놓은 덕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외국인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주고받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콘텐츠’를 흥미진진하게 습득한다. 2007년에 한국에서 클래식음악 돌풍을 불러일으킨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만화를 드라마로 만든 것은 또 어떤가. 이런 게 되어야 선진국인 것이다.

30대 후반의 새파란 나이에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거쳐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까지 역임한 이경숙 위원장은 orange juice(나는 영어 발음이 엉망이니 그냥 로마자로 적겠다)를 앞에 두고 서양인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가.

혹시 ‘신곡’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영어번역본으로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대학의 총장이면 이 정도는 자연스럽게 떠들어줘야 기본을 갖춘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그것이 기본이라고 스승에게 배운 적이 있는가. 발음이 엉망이어서 선진국 못된다는 그 발상, 한마디로 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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