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아래 사제단)이 다시 뜨거운 뉴스의 한복판, 아니 현대사의 뜨거운 현장에 섰다. 5일 오후 사제단이 기자회견을 연 서울 제기동 성당에는 200여명의 보도진이 몰려 치열한 취재 경쟁을 벌였다.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변호사)의 기자회견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제기동 성당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 사제로 있는 곳이다.

삼성 비자금 의혹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사제단이 주도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김인국 사제단 총무신부는 지난달 29일 첫 기자회견을 열면서 "금년은 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해다. 20년 전 박종철군의 죽음을 알렸던 사제단은 오늘 하느님의 명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민주주의가 진전되기를 위한 간절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한겨레 인터넷판 10월29일)고 말했다. 사제단은 꼭 20년 전인 1987년 5월18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온 국민을 충격과 분노에 몰아넣었으며, 그것은 곧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바 있다. 
 

   
  ▲ '삼성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2차 기자회견이 열린 5일 서울 제기동 성당 기자회견장에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이 직접 나와 심경을 밝혔다. ⓒ이창길 기자 photoeye@  
 
사제단은 유신정권 시절인 1974년 결성된 이래 굴곡의 현대사 굽이굽이에 큰 족적을 남겼다. 사제단 결성은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였다는 이유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사제단은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 인혁당 사건,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오원춘씨 사건, 부산 미문화원 사건, 박종철 열사 사건, 문규현 신부·임수경 대표 방북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자들의 신부님'으로 그들의 곁에 섰다.

천주교인이 아닌 것으로 알려진 김용철 변호사가 사제단을 찾은 것도 우연은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5일 발표한 고백문에서 "많은 언론과 시민단체에 호소했다. 하지만 모두 외면했다. 갈 곳이 없었다. 낭떠러지 앞에 선 절망 속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님들께서 저의 뜻을 받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김용철 변호사는 3일 방송된 MBC <뉴스후>에서도 그러한 심경을 토로했다. "고민을 하고 결심을 하고 여러 사람과 의논을 했는데 전부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첫째, 내부 고발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고 그 다음에 언론 보도가 불가능하고…. 우연히 제 친구가 '함(세웅) 신부님에게 한번 가보면 어떠냐' 그래서 정말로 우연히 따라 갔어요. 우연히. 그랬다가 잠깐 뵙고 신부님도 고민을 오래 하셨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사제관에 온 걸 저는 굉장히, 요즘엔 정말 행복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제단도 고민이 없을 수 없었고 기자회견을 막으려는 안팎의 움직임도 있었다. 시사인(8호·11월5일 발매)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니 나서지 말자는 사제단 신부도 적지 않았다. 기자회견 직전까지도 회견을 막아야 한다는 신부가 있었다. 사제단에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신부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신자들은 물론 민주화 운동의 선후배와 정부 고위 관료들까지 나서 삼성의 입이 됐다. 똑같은 말을 했다. '지금까지 지켜온 사제단의 명성에 흙탕물을 튀길 것이다.' 심지어 현직 최고위급 관료도 삼성의 뜻을 전하러 찾아왔다." 사제단의 한 신부는 "삼성이 신부의 뒤를 캐거나 약한 신부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했다"면서도 "중요한 건 사제 정신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제단과 김용철 변호사는 두 차례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 관련 여러 의혹을 폭로했다. 사실이라면 정말 메가톤급이다. 이제 이러한 의혹들은 사실 여부 규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 귀결이 어떻게 되든, 이번 사건에서 분명한 것은 사제단이 고민 끝에 나서기로 판단할 만큼 삼성이 경제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고, 한국 사회에서 삼성 내부 고발자를 보호해 줄만한 버팀목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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