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명예는 회복되었는가. 5·18이 국가법정기념일로 지정되고 5·18묘역이 성역화 되는 등 ‘광주’는 열일곱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양지의 햇살을 받는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명예회복이 아니라는 것은 97년의 ‘광주’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온국민의 숙연한 축제가 되지 못하고 쓸쓸히 저물어간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또 하나 확인되는 것은 ‘광주’가 그 긴 세월동안 음지에 자리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고간 언론이 여전히 ‘광주’를 향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17년 전의 왜곡보도의 원죄를 갚기는 커녕 아직도 ‘광주’ 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5·18을 전후해 ‘광주’를 사설로 다룬 신문은 중앙종합일간지와 지방지를 합쳐 모두 13개 신문. 하지만 이들 신문이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각기 달랐다.

한겨레와 광주·전남지역의 신문들은 입을 모아 ‘광주’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전·노재판을 통해서도 밝혀지지 않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비로소 ‘광주’가 부활할 수 있다는 논지를 견지했다. 5·18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하고 희생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자는데도 입을 모았다.

이들 신문이 주장한 또 하나의 해결과제는 ‘광주’의 전국화. ‘광주’의 이념과 정신이 산과 강을 넘어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겨레가 19일자 사설 ‘법정기념일 ‘5·18’의 겉과 속’에서 방송3사의 ‘광주’ 외면을 ‘직무태만’이라고 질타한 것은 ‘광주’의 전국화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언론의 적극적 의지라는 점을 환기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무시 또는 본질 호도로 ‘화답’했다. 비호남 지역의 지방지 대다수가 ‘광주’를 사설로 다루지 않았으며 다룬 신문도 본질 비껴가기로 일관했다.

동아, 서울, 조선, 중앙, 한국 등 ‘광주’를 사설로 다룬 중앙종합일간지의 논조는 뚜렷했다. 전·노의 사법처리와 국가기념일 지정 등으로 ‘광주’는 일단락됐다는 점, 따라서 이제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화해와 관용의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 이들 신문의 대체적인 논조였다.

“광주는 저항의 이념만이 아닌 건설과 번영과 발전의 이념으로서 희망찬 내일의 설계사가 돼야 할 것”(조선), “그(광주) 비극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 자위하면서 갈등없는 21세기를 맞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한국), “광주의 의로움과 왜곡을 푸는 길은 5·18의 이해에 모든 국민이 적극적으로 다가가 80년 광주의 함성과 비극을 추체험하는 것”(동아)이라는 게 이들 신문이 제시한 ‘광주’의 해법이었다.

특히 중앙일보는 18일자 사설 ‘5·18정신의 전국화’에서 “당시 관계자들은 엄한 법의 심판을 받았다”고 전제하며서 “관용과 포용의 자세로 광주 스스로 5·18을 혼자서 끌어안으려 들지 말고 전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광주’의 전국화를 위한 선결조건으로 “감상적 한의 차원을 벗어나는 (광주시민의) 대승적 자세”, “민주화의 기본정신을 한 지역의 한으로 국한시키지 말 것” 등을 제시하는 등 광주시민들의 편협한 태도가 ‘광주’의 전국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논리를 폈다. 중앙은 또 이 사설에서 ‘광주항쟁’과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혼용, 사고의 분열상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부산일보는 17일자 사설 ‘5·18을 국민 모두의 것으로’에서 진지하면서도 냉철한 자세로 ‘광주’를 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부산일보는 이 사설에서 “5·18정신은 인간 존엄과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정신이었으며 아픔에 동참하는 나눔의 정신이었다”고 평가하고 ‘광주’ 정신의 계승을 위한 해결과제로 ‘광주’의 진실규명과 보다 철저한 과거청산을 주장했다. 부산일보는 또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전·노씨 사면론이 피어오르는 것은 통탄할 일”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광주’의 전국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언론을 지목, 질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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