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 총장’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데올로그였다.

우리의 무리 안에 세상을 파괴하는데만 골몰하는 검은 세력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늘 감시하고 찾아내야 한다는 분열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였다. 그는 94년 한 해 이 사회를 자기검열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여기에 지성을 대표한다는 곳곳의 단체들이 지지성명을 내고 목소리 높여 그의 용기를 칭찬했다. 가장 앞장선 것은 역시 언론이었다.

94년 7월 18일 박 총장은 김영삼 대통령과 전국 14개 대학 총장이 함께한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주사파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일부 학생들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고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 사노맹 뒤에는 북한의 사노청, 사노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발언해 학생운동권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김일성 사망을 놓고 벌어진 조문논쟁은 일시에 물밑으로 가라앉고 서슬퍼런 냉기가 휘몰아쳤다.

그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양극으로 치달았다. 우리농업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등 농민단체들은 “운동권 학생들이 김정일에게 UR 지준 반대운동을 펴라는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는 박총장의 발언에 항의성명을 냈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무지와 편견에 의한 것으로 양심과 상식을 넘어선 표현”이라고 비난하고 박총장의 발언철회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대학교수들의 박총장 발언 지지성명이 대칭을 이루었다. 21일 서강대 경영대학 교수들이, 22일에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 20개 대학총장들이 박총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김대통령도 강력 대처의지를 밝히고 검찰 공안부가 사노맹과 연계된 조직으로 추정된다고 밝히면서 수사에 착수하자 공안분위기는 극으로 치달았다.

박총장은 이어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유학생이 교수로 있다’는 충격 발언에 이어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 등 연이은 폭탄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고 고해성사 내용을 발설해 종교계에 또 다른 파장을 불렀다. 이같은 사건들은 94년 말까지 계속되면서 안기부의 공안 수사와 대학교재·교수·학생들에 대한 검열 파문을 낳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박총장 파문을 여과없이 전달함으로써 공안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최초 발언파문이 있은 직후 19일자 중앙일보는 ‘병균은 색출해야 한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20일자 한국일보도 ‘박홍 총장의 용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어 학생들에게 의혹의 화살을 겨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박총장 발언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언론은 어떤 것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지난 1월 박총장이 학교를 떠나면서 주사파 색출에 기여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실어주는 배려를 보였다.

1950년대 초 매카시즘 열풍을 일으킨 조셉 매카시는 기사거리에 목맨 기자들의 속성과 마감시간이라는 신문의 생리를 잘 알아 언론을 적절히 이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나중에 철저히 매카시를 외면하고 비판함으로써 그의 죄과를 치루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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