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용구조상 (프로그램) 한 편이 끝나고 나서 그 PD가 제작하는 다음 편을 계속 할 수 있냐 없냐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PD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날 술자리에서 PD는 자기가 다른 부서에 가게 된다고 해도 저를 잘 챙겨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그날 새벽 계획적으로 저를 따라와 빈 사무실에서 성추행했을 때 그런 이유에서 제가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MBC 시사교양국 A PD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B 작가가 지난 12일 MBC 구성작가협의회 게시판에 올린 글의 일부다. 사건 이후 미디어오늘에는 본인이 직접 성희롱 사건을 경험하거나 주변에서 목격한 이들의 제보가 잇따랐다.

일부 작가들 사이에서는 성희롱 사건이 한 개인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작가와 PD의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고용의 상당부분을 PD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집단적으로 해결할 창구도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올해로 9년째 방송작가 일을 하고 있는 박모씨는 “PD와 작가가 갑과 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PD들과 관계가 좋으면 다른 프로그램으로 연결되기도 쉽고 일하기도 편한 게 사실”이라며 “성추행 사건은 대부분 당사자가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동료나 선배작가들이 알게 되더라도 뾰족한 대처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6년차 다른 작가는 “막내작가 시절 한 외주제작사에서 팀장급 PD들에게 언어 성희롱을 종종 당하곤 했다”며 “그때마다 ‘메인 작가’로 활동하는 선배들은 이것도 못 참으면 사회생활 못 한다고 했었고 내가 그 농담을 넘길만한 연차가 됐을 땐 작가 목숨이 PD에게 달려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씁쓸해했다.

방송사나 프로덕션의 고위간부들에 대해서도 작가들은 약자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크고 작은 성희롱을 당하고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어렵게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결국 피해자가 더 큰 2차 피해를 입고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MBC 구성작가협의회 한숙자 회장은 “과거에도 상습적인 성희롱 사건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 이번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본다”며 “팀 내에서 적당히 사과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재발방지를 위한 공식적인 시스템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MBC 구성작가협의회와 MBC 여사원협의회는 성희롱 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회사 쪽과 협의하고 있다. 

한편 작가들은 이번 사건이 쉽게 일반화돼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한 외주제작사에서 일하고 있는 9년차 작가 김모씨는 “특수한 몇몇 사건을 일반화해서 좋은 PD들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라는 직종이 지금과 같은 고용구조가 바뀔 수 있는 직종도 아니라고 본다”며 방송계의 자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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