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도 정부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한보사태는 물론이고 조선(북한) 황장엽비서 망명과 이한영씨 피격사건으로 온 나라에 미스터리와 설만 무성하다.

12일 황씨망명이후 그 동기와 배경을 싸고 숱한 추측보도가 쏟아졌다. 북권력 암투중 실권설, 숙청임박설등은 북체제 위기론으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황은 북의 개혁파 밀사”(경향 19일자)까지 나왔다.

황씨가 한국공관에 머무는 동안에도 남한내 고정간첩 5만여명(문화 14일), 미CIA접촉설(문화 15일), 김대통령 측근 망명 주선설(중앙 16일), 중 외교부부장 면담설(중앙 17일), 황씨부인 모스크바 체재설, 수양딸 중국 피신설 등이 줄을 이었다. 이 모든 보도의 취재원은 여권고위관계자, 중·일 소식통등 익명이었고 정부에선 모두 부인해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설로만 남게 됐다.

특히 동아는 17, 18일 CIA면담록을 입수했다며 ‘북 최고위층 5∼7명 망명준비’를 보도해 큰 파문을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진위여부를 떠나 국익과 인권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는 지적이다.

문화 14일자 “남한내 고정간첩 5만명”은 이틀뒤 이한영씨 피격과 맞물려 각종설을 확대 재생산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것은 “남 깊숙한 곳에 북세력” “김정일 책상서 여권핵심 회의록 봤다”로 이어졌고 16일부터는 신문마다 대남테러 비상 시리즈가 봇물터지듯 했다. 이들 기획기사는 귀순자나 공안전문가의 말을 빌려 썼으며 일부 추측을 사실인양 포장했다.

인구 1천명당 1명꼴인 간첩 숫자에 대한 보도가 잇따르고 각종 억측이 나돌아 국민불안을 고조시키자 18일 공안당국은 남파간첩은 5백∼6백명선이며 실제 활동중인 고정간첩은 수천명선이라고 해명성(?)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씨 피격은 사건 다음날부터 사실상 간첩소행으로 단정하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피의 보복 신호(한국), 김정일 생일 진상품(조선), 황장엽 겨냥 경고(동아)로 분석했다. 이와 함께 제 2테러 우려, 간첩침투경로, 조선(북한) 사회문화부 소행설이 나오더니 인민무력부가 이씨 피격을 주도했다(한국 18일)는 보도로 이어졌다.

한편 황씨 망명뒤 불과 4일만에 조선(북한)간첩이 수도권에 침투했다는 것에 대해 야당이 안보태세 허점을 질타하자 17일엔 대공관계자의 말을 인용, 조선(북한)이 10일전에 간첩을 남파했으며 이씨 피격이 황씨 망명의 보복은 아닌것 같다고 보도해 꿰맞추기식이라는 눈총을 샀다.

또한 이씨로부터 간첩이라는 말을 들은 목격자가 신문마다 엇갈려 기사의 정확성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동아·조선·한겨레는 박모씨로, 중앙·경향은 남모씨로 보도했다. 더욱이 조선은 수사관들이 병원에서 이씨로부터 직접 “간첩이야”라고 들었다고 사회면톱으로 보도했으나 이틀뒤 목격자들은 이씨로부터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북테러위협과 간첩논쟁은 19일 북의 황씨 망명 인정을 시사하는 발언이 나오고 이씨 피습이 단순살인사건일수도 있다는 경찰발표가 나오면서 수그러들었다.

대북문제에서 추측보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건을 추적해서 쓰기보다는 ‘물 안먹기’가 우선시 되어왔던 것도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이런 언론풍토 속에서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의 보도자세는 설에 설을 더한 결과로 나타날 뿐이었다.

각 신문사의 자칭 특종이라는 이들 설중에는 사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망명이 진행중인 상황, 수사가 진행중인 상황을 고려할때 그 진위여부는 그 다음 순서로 평가되는 것이 상식이다.

결국 이번 황씨망명과 이씨 피습보도는 사태를 바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국민적 불안과 혼란만을 초래했다는 것이 민실위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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