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객관성에 대한 오해
저널리즘 객관성에 대한 오해
[해외언론은 지금]

   
  ▲ 서명준·독일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과정  
 
언론보도의 객관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여겨지고 있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보도가 저널리즘의 객관성을 실현시킨다는 시각도 여전하다. ‘중립적이고 순수한’ 언론보도가 저널리즘의 절대원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독일 공영방송(ARD/ZDF)의 뉴스프로그램들(<타게스샤우>, <호이테>)은 정확한 사실보도와 분석으로 인해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들도 팩트(fact) 위주의 보도량이 분석과 논평을 넘어서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편성구조가 좀더 비판적인 기사를 작성하고 싶은 기자의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독일 일선기자들은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분쟁과 갈등이 점증하는 오늘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 중립적이고 순수한 보도는 사실상 문제의식을 상실했거나 냉소적인 언론보도에 불과하다는 데에 독일 언론계 전반이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뉴스의 전달수단인 언어는 이미 정치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다. 언어는 ‘현실’이 아닌 ‘현실적’ 대상에 대한 의식의 표상이다. 그리고 권력과 지배관계에 의해 규정된 사회현실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중립적인 뉴스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따라서 뉴스의 진실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저널리즘의 객관성이라는 절대원칙은 오히려 정보에 대한 비판적 분석보다 중립적인 팩트 기사를 양산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 보도를 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객관성 원칙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비판적 공론장을 훼손하고 풍부한 팩트 정보에 집중함으로써 ‘서비스 저널리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예컨대 공영방송의 공공성이 일종의 공적 ‘서비스’로서 나타나고 있다.

사실보도가 저널리즘의 토대를 이룬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예방했다”와 같은 단순보도 기사는 자주 되풀이되는 기사문의 전형이다. 이렇게 유형화된 보도형식에 따라 생산된 기사는 오보를 낼 위험성이 매우 적다.

이러한 뉴스상품은 ‘불량품’이 적기 때문에 객관적 언론보도라는 미명하에 선호된다. 주요 정치인을 비롯한 정치권의 행보에 대한 단순사실 보도는 국정홍보매체의 역할을 무색케 할 정도다. 물론 단순사실보도조차 팩트와 다르다면, 해당 언론사는 저널리즘의 기초를 완전히 저버린 것이다.

뉴스의 원천인 정보는 사회세력의 이해관계로부터 발생한 사회적 과정 그 자체이지, 파편화되고 분리된 요소가 아니다. 더군다나 하나의 정보는 수많은 외적 관계를 갖고 있으며 각 사회세력의 권력규모나 파급효과에 따라 뉴스가치가 달라진다.

이러한 뉴스 정보생산메커니즘에 기자들이 종속되어 있다는 점만이 유일하게 ‘객관적’이다. 하지만 정보 선별 과정도 주관적임을 감안하면, 객관성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진다. 따라서 객관성 논쟁보다는 오히려 뉴스와 정보를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인식하는 일종의 ‘뉴스의 변증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져야한다.

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는 일선기자들은 이와 관련한 문제를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매일 반복되는 편집마감시간의 압박은 기자의 노트북에서 권력의 복합구조가 명쾌하게 분석되는 것을 방해한다. 기자들 사이에는 이런 논의가 현장을 벗어난 대학의 강의실에서나 필요한 아카데믹한 공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객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공익 저널리즘을 실현하려는 언론매체는 뉴스가 권력의 메커니즘 속에서 비로소 파악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인식하고 정치와 아울러 경제권력 비판에 충실해야 한다고 독일 언론학자들은 지적한다. ‘뉴스의 변증법’에 대한 인식은 이른바 참언론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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