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서강대에서 열린 제3회 ‘맑스코뮤날레’ 둘째날 행사를 보도한 참세상 기사의 제목은 <불붙은 한국학술진흥재단 기금활용>이다. 분명히 ‘계급혁명인가 분자혁명인가’라는 토론주제가 있는데, 이것은 부제처럼 밀려나 있다.

여기서 문제를 제기한 이는 조정환이었다. 그는 “발제문이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예산을 받았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고 서먹서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하면서 “맑스코뮤날레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논문들이 공공연한 석상에 오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고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다른 논문이라면 몰라도 마르크스에 관한 것을 정부 지원을 받아쓴다는 것에는 나도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령 내가 가끔 사서 보는 반년간지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속표지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간행”한다는 알림글을 적어두고 있으며,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은 논문을 싣기도 한다.

2006년에 나온 제3권 제2호에는 곽노완의 ‘마르크스 사회(공산)주의론의 모순과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논문이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임을 밝히고 있으며, 이정구의 ‘새로운 대안경제의 모색’ 역시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라는 표시를 논문 하단에 덧붙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이들은 국가가 연구자에게 지원하는 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러한 재원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어디서 돈을 받든 연구 열심히 해서 학문 발전에 기여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러한 논문 자체를 통해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적인 사람’으로 제시하는 이들은 정체성 문제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실 정부에게서건 맘씨 좋은 자본가에게서건 돈을 받는다는 것은 돈을 받는 것 자체로 끝나질 않는다. 돈을 주고받는 거래관계로 인해,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유적 존재로서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상태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돈을 주고받으니 돈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돈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소외현상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12년 6개월 동안 이어져 오다가 최근 100회를 끝으로 정리된 부산대의 인문학담론모임에서 한문학과의 강명관 교수는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공장의 침묵>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참혹한 현상들이 처절하게 거론돼 있다. 몇 가지를 들춰보자.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의 일상에서의 대화가 얼마나 처참해졌는지. 학문의 내용은 사라지고 오로지 연구비, 학술진흥재단이 대화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또 이따금 어떤 연구자가 거창한 연구비를 수주했다(거창한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수치감도 버린 지 오래다.” “가증스러운 일은, 이런 연구비의 저주를 당연시하면서, 연구비로 연구를 통제하고 연구자를 노예화하는 외적 강제를 열렬히 찬양하는 주구(走狗)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강명관의 글을 읽고 나니 요즘 대학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으며, 왜 그리 돈을 쏟아부어도 인문학이 발전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인문학을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개(走狗)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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