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비자로 입국 … 긴장속 좌충우돌
북 경

북경이 한국 기자들의 취재경쟁으로 숨가쁘다. 황장엽 망명, 등소평 사망등 굵직 굵직한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북경 시내에는 한국특파원들과 본사에서 긴급 파견된 취재진 등 80여명의 기자들이 북적대고 있다.

중앙일보가 사진기자를 포함, 6명의 기자를 급파한 것을 비롯해 조선·한국·동아 등 대부분의 신문·방송사들이 4~5명선의 기자들을 북경에 내 보냈다. 이들 기자들은 중국 당국의 눈총과 정보기근에 시달리면서 북경시내를 누비고 있다.

현재 북경에 파견된 기자 대부분은 사실상 불법 취재 상태. 시간 촉박과 입국 허가를 수월하게 얻어내기 위해 취재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들어와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 이로 인해 중국 당국이 언제든지 추방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중국 외무부는 12일 한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한국 언론인들이 입국 목적과 달리 불법적인 취재를 벌이고 있다며 과열 취재 자제와 전원 철수를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 당국의 곱지 않은 시선은 공안당국의 집요한 감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조선(북한)대사관을 경비하고 있는 중국 공안요원들은 철제경계선을 설정해 이를 어기는 기자들을 밀어내는가하면 일부 사진기자들의 필름을 빼앗기도 했다.

14일에는 조선(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한국 기자들간에 시비가 붙었다. 대사관 직원들이 취재중이던 한국 기자들에게 다가와 “여기는 무엇하러 왔느냐”며 멱살까지 잡는 험악한 상황이 연출됐다. 한국특파원들의 집에는 신원 미상의 사람들로부터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한국 기자들은 주중 한국대사관과 북한대사관, 총영사관 등을 취재 거점으로 삼아 바쁘게 오가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 ‘일용한 양식’을 쉽게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기자들이 가장 의존하고 있는 한국대사관의 경우 공보관 외에는 면담 조차 쉽지 않은 상태. 황씨 한국행을 둘러싼 중국과의 협상 내용을 브리핑해주는 경우도 거의 없고 기자 간담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19일에는 한국 대사관에서 기자들과 고위 간부들간에 고성이 오가는 등 ‘갈등’을 빚기도 했다.

현재 북경에서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는 국민일보 국제부 박동수 기자는 “기사경쟁과 미흡한 취재 여건으로 기자들의 마음과 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기자들과 한국 당국자들간에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취재원 통제에 작문 쓸 수밖에 …”
분 당

“사건이 점차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봐야죠.”

나흘 동안 3, 4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는 한 방송 기자는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이렇게 이후 수사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 20일 오후 1시 30분께 이한영씨 피격 사건 수사본부가 있는 성남 분당 경찰서 4층 기자회견장. 한눈에 들어오는 기자회견장엔 50여명의 기자들만이 임시 책상으로 사용되고 있는 탁구대 주변에 모여 앉아 있었다. 하루 전까지만해도 1백50여명의 기자들의 취재 경쟁으로 때론 고성이 오고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날 기자회견장은 한산한 분위기였다.

사건 초기 한 언론사당 8명까지 파견됐던 기자들이 이제는 최소 인원만 남겨 놓고는 대부분 철수한 상태였다. 합동수사본부가 수사 방향을 대공쪽에 맞춘 채 닷새째 수사를 벌였으나 별 다른 성과가 없던 게 주요한 원인인듯 했다. 한 기자는 “초기에 브라우닝 권총을 사용한 간첩의 총기 피격이라고 추정했다가 국과수 조사결과 탄피가 체코제라는 게 밝혀지고 목격자마저 증언을 번복한 상황에서 경찰 수사가 제대로 진척되겠느냐”고 경찰쪽 분위기를 전했다.

기자들 역시 이씨 피격 사건이 간첩 소행이란 데 대해선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한 중앙 일간지 기자는 “지금은 진실이 아닌 모든 것을 추론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간첩 소행이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방송 기자는 “초동 수사가 예단 수사였다는 게 드러난 마당에 누가 수사 발표를 믿어주겠느냐”고 전했다.

그는 또 “경찰들은 안기부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며 “실제 사건 수사는 안기부가 우선권이 있고 경찰은 통보받는 입장”이라고 말해 안기부에 대한 경찰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전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2시엔 수사 상황에 대한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돌연 취소됐다. 하루 전 김충남 분당경찰서장이 경질된데다 수사본부장인 김덕순경기지방 경찰청장이 부재중이기 때문이었다. 수사본부 공보관이 회견장에 올라와 간략한 수사상황이 적힌 보도자료를 배포한 뒤 이런 사정을 설명했다.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부었다. “오전에 재조사는 왜 알리지 않았나요. 그리고 사건 현장 출입은 왜 막습니까”, “아무도 출입을 막지 않아요” “지금도 막고 있는데요…” 기자들과 경찰 공보관의 설전이 오고갔다. 기자들은 기자회견장을 빠져 나가는 공보관을 따라 2층 수사본부 입구까지 내려갔다. 이날 오전에 사건 현장 재조사를 기자들 ‘몰래’ 실시한 데 대해 기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 경찰들은 사건 현장인 현대아파트 418동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아파트 앞에서 취재 차량을 대기시켜 놓은 한 방송 기자는 “경찰의 통제가 지나치다”며 “목격자와의 접촉이 불가능한 상황에선 작문 밖에 쓸게 없지 않느냐”고 볼멘 소리를 냈다. 이씨가 입원해 있는 차병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3층 중환자실 입구는 8명의 전경 요원이 봉쇄한 가운데 사진과 카메라기자들만이 그 앞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0일 오후 분당 경찰서를 중심으로 한 이씨 피격 사건 취재 현장은 언제 그런 사건이 있었느냐는 듯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사건 초기 ‘간첩 소행’이라고 한 경찰 추정이 좀처럼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탓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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