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사건에 곧 이어 터진 황장엽 조선(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과 이한영씨 피격 사건과 관련된 언론 보도는 사건의 실체를 알려주기 보다는 보다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황씨 망명의 경우 주요 언론사들이 잇따라 특종을 터뜨리고 있기는 하지만 국민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에는 역부족이며 오히려 온갖 미확인 ‘설’이 난무함으로써 궁금증만 가중시키고 있다. 일각에선 지나친 특종 경쟁이 자칫 국익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한영씨 피격 사건에서도 언론은 경찰 수사 발표를 ‘받아쓰기’와 ‘뻥튀기’로 일관하다가 막상 수사상 허점이 노출되자 자신의 예단 보도의 문제점엔 눈감은 채 경찰만 나무라는 형국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목격자 증언이 번복되고 피격에 사용된 총기가 어떤 종류인지도 밝혀지지 않아 자칫 미궁에 빠질 우려마저 없지 않다. 황씨 망명과 이씨 피격 보도에서 제기되는 의문과 문제점을 정리해 보았다.



‘남한 간첩 5만명’ 보도
충격적 내용 확인없이 기사화



한국은 간첩의 천국인가. 5만명 간첩설을 보도한 문화일보에 따르면 그렇다. 1천명 가운데 1명이 간첩인 셈이다.

문화일보는 지난 14일자 머릿기사로 지난해 8월 당시 황장엽 조선(북한) 노동당 비서를 만났다는 여권 한 핵심관계자의 말을 인용, “황비서는 고정간첩 문제를 거론하면서 실례로 우연히 김정일의 집무실 책상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보았는데 이 서류에는 그날 아침 여권 핵심기관의 회의 내용과 참석자들의 발언 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고 말했다”고까지 전했다. 집권 여당의 핵심부에서 북의 간첩이 암약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국내 고정 간첩의 숫자와 관련해서는 정부 당국이 ‘대략 어느 정도이다’는 식으로 추정할 뿐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황씨가 그런 발언을 했다면 문화일보의 보도는 최초로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는 간첩의 숫자를 밝혀낸 ‘특종’일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특종’ 보도에 대한 반응은 냉담하다. 문화일보 노조는 자사 보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문화일보 노조는 지난 20일자 노보를 통해 “전 안기부 고위 간부에 따르면 거점확보 및 세포 관리 등 고첩 1일단 연간 비용이 10억원이 든다는데 50조원을 감당할 능력이 있다는 것인가”라는 사내에 회자되는 얘기를 소개하면서 “간첩 5만명 기사가 남한내 보수강경세력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며 확인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문화일보가 ‘냄비언론’, ‘한건주의’등의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간첩 5만명’의 실체를 입증할 수 있도록 계속 심층 추적보도(?)해야 할 것이다”고 꼬집었다. 노조는 또 “워낙 충격적인 것이라 올리긴 했지만 좀 심했지”라는 국장단의 발언을 전하기도 했다.

문화일보는 또 이 ‘특종’ 기사를 게재한 이후 기획시리즈 ‘고정간첩의 실체’를 3회 연재했으나 대부분 과거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나열하는데 그쳤다. 그뿐 아니라 이 연재물 2회분에는 “(간첩)수만명설은 주공작원(PA), 행동공작원(AA), 잠복고첩, 포섭세력 등을 합친 숫자이고 핵심고첩인 PA는 5백∼1천여명 정도라는게 당국의 계산이다”라고 해 당초 ‘간첩’ 5만명설과 차이를 보였다.

문화일보의 ‘간첩 5만명’ 기사는 통일안보팀이 출고한 것으로 돼 있으나 통일안보팀장은 노조측에 “모른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문화일보 통일안보팀장은 보도 경위를 묻는 질문에 “바쁘다. 회사 일이라 말할 수 없다”며 답변을 피했다.

문화일보의 보도가 어떤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언론에 대한 불신감과 대북 경각심만 약화시키지 않을까하는 우려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일보 노조가 한 공안 당국자가 타신문 기사들에게 한 말을 인용한 대목은 시사하는바 크다. “문화일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번 망명 건이 대공 경각심을 제고할 절호의 기회인데 이런 식이면 희화화되고 만다. 국민이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어디 믿겠는가.”


‘황장엽씨 망명’ 보도
미스터리 연속 … 의문 곳곳



‘미스터리’의 연속이었다. 황씨 망명을 둘러싸고 진행된 일련의 언론 보도는 1보 1보가 나올 때마다 더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황장엽 조선(북한) 노동당 비서가 망명 신청을 했다는 사실이 지난 12일 저녁 방송 뉴스 시간을 통해 보도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더 한층 ‘충격’을 안겨준 것은 바로 조선일보의 13일자에 게재된 황씨의 자필 서신이었다.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개선해 통과시킨 것은 좋은 일”이라던가 “안기부와 여당을 강화해야 한다”는 등 여권의 한 고위 당직자가 말했을 성싶은 서신의 내용은 물론, 어떻게 이 서신을 입수하게 됐는지가 주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황씨가 주중 총영사관에서 쓴 석명서와 조선일보에 공개된 서신을 비교할 때 내용과 논리 전개 방식 등에 차이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조선일보의 황씨 서신 ‘파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사이 이번에는 동아일보가 바톤을 넘겨 받았다. 동아일보는 지난 17일자에 북에 망명을 준비하는 고위급 인사가 5∼7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하루 뒤엔 망명을 준비중인 고위급 인사들중에는 당 서열 20위 내의 거물도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1급 비밀의 ‘누설’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동아의 ‘특종’은 그 사실이 황씨와 미국 중앙정보국(CIA) 관계자와의 면담록에 기초해 작성됐다는 데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이미 황씨 망명과 관련해 CIA까지 개입됐다는 것인가라는 의혹이 이어졌다.

이처럼 황씨 망명을 둘러싼 언론 보도에 대해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 발행된 시사저널 2월27일자는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시사저널은 이 서신이 A씨가 아닌 김덕홍씨에게 보낸 것이라고 전했다. A씨 등 국내 사업가들을 만날 때 토론해 보라고 쓴 일종의 지침서라는 얘기다.

이 서신과 관련해 특히 관심을 끄는 점은 바로 A씨가 월간조선 기자를 만나기 전에 안기부쪽과 접촉해 창씨의 서신 사본을 건넸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기부는 이 서신에 대해 A씨가 기대한 만큼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왜였을까. 안기부가 이미 황씨의 ‘사상적 고뇌’를 비롯한 그와 관련된 많은 정보를 수집하지 않은 한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이는 곧 안기부가 이전부터 황씨의 망명 문제에 깊숙히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실제 국내외 보도에 따르면 황씨는 이미 지난해 7월 자신의 망명 의사를 김덕홍씨와 관계를 맺고 있는 국내 기업인을 통해 우리측 정부에 전달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5일 일본의 NHK 방송은 황씨 망명에 김대통령의 ‘최측근’이 개입됐다고 보도했다. NHK는 지난해 9월 이 ‘최측근’ 인사가 중국 베이징에 가서 김덕홍씨를 만나 황씨의 망명의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즉 저간의 사정은 안기부가 황씨의 망명 사실을 인지 하고 있었을 것이란 추론에 신뢰도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황씨 망명 ‘파문’은 아직도 이곳저곳에 의문점을 남겨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 황씨의 망명을 줄곳 지켜봐 왔을 안기부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망명의 전 과정을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한영씨 피격’ 보도
수사 당국 발표따라 오락가락



‘늑대가 나타났다!’

지난 15일 발생한 이한영씨 피격 사건에 대한 일련의 언론보도는 이솝 우화의 ‘양치기 소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경찰 수사 발표에서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을 돌리지 않은 채 이씨 피격 사건을 황장엽 조선(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과 직결된 보복테러로 단정 보도해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언론은 사건 발생 이틀째인 지난 17일 너나 할 것 없이 간첩의 보복테러일 가능성이 높다는 정부와 수사당국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머릿기사로 올렸다. 경찰의 간첩 소행이란 발표 내용에 ‘추정’이란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언론은 사실상 이씨의 조선(북한) 간첩에 의한 권총 피격을 기정 사실화한 것이다.

각 언론은 이날부터 이씨 피격 사건과 황장엽 조선(북한) 노동당비서 망명의 연관성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조선(북한)이 ‘변절자’에 가하는 보복 테러의 잔인성을 다룬 연재물과 탈북자들의 불안 상태를 집중 조명한 기획 기사로 쏟아냈다.

그러나 경찰 수사가 진척되는 과정에서 이씨 피격 사건을 둘러싼 의문점이 하나 둘 씩 드러나자 이에 기초했던 언론의 ‘이씨 피격=간첩 테러’ 등식 역시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지난 17일 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탄피는 브라우닝 탄알이 아닌 체코의 ‘셀리어 앤드 벨럿(S&B)’사 제품이었으며 사용된 총기는 ‘6조 우선’의 강선으로 된 권총이라고 발표했다.

이씨 피격에 사용된 총기가 브라우닝 권총이었는지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또한 이씨가 피격 직후 “간첩, 간첩…”이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는 목격자 증언이 지난 19일자 중앙일보의 보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격자 남모씨가 중앙일보 기자에게 “이씨가 웅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남씨는 또 이씨가 손가락 두개를 펴보였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결국 수사 당국이 간첩 소행으로 추정하게 된 결정적 단서였던 총기의 제원과 목격자 증언에 강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몇몇 신문사를 제외한 대부분 언론은 이같은 의혹은 덮어둔 채 갈팡질팡하는 수사 당국만을 질타할 뿐이었다. 현재 수사 당국은 간첩 테러 쪽에 큰 비중을 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최근에 밝혀진 이씨의 과거 행적과 관련해 러시아 마피아의 개입 가능성까지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지난 19일을 고비로 언론의 이번 이씨 피격 사건 보도는 한풀 꺽였다. 경찰 수사의 진척 상황이 포착되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수사 발표에서 잇따라 석연치 않은 의문점이 제기된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이 이번 이씨의 총기 피격 사실을 북의 간첩 테러로 등치시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데 대해선 일차적으로 수사 당국에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초기 수사 단계에서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수사 당국의 추정 발표 내용을 아무런 여과 없이 사실인 양 과장 보도하는 언론의 경망스러움은 지적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또한 과거 조선(북한)이 자행한 테러의 실상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 보도하는 게 국민적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것외에 이씨 피격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짚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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