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전 미국대통령의 워터게이트사건과 타나카전 일본총리의 록키드사건을 그야말로 막판까지 추적했던 두 저널리스트의 만남이 떠오른다. 한사람은 ‘대통령 음모’를 펴낸 ‘워싱턴포스트’의 우드워드 기자이며, 다른 한사람은 <타나카 카쿠에이 연구>를 펴낸 프리랜서 타치바나 타카시이다. 이른바 탐사보도의 금자탑을 이루어냈다고 평가되는 그들은 말한다.

“워터게이트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닉슨이라는 사람은 줄곧 계산착오만을 거듭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국민이 납득하리라고 믿고, 처음엔 소득신고서를 발표했다가 안되니까 마침내 감추고 있던 테이프를 제출하지 않았던가. 그 모두가 역효과를 냈을 뿐이지 않은가?” 타치바나의 말이다.

우드워드도 맞장구를 친다. “계산착오라고 지적했지만, 사실은 마지막 도청테이프를 제출한 것도 대법원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닉슨은 언제나 진실의 90%까지는 밝히면서도 나머지 10%만은 결코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이다. 만일 그가 ‘참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더라면, 국민은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이땅의 백성들을 분노와 허탈에 빠지게 한 한보사태가 한보게이트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는 탓인가. 워터게이트와 록키드사건이 두가닥의 연상법으로 떠오르는 작금이다. 그 한가닥은 감추고 또 감추다가 마침내는 스스로 비극을 불러들이게 된 권력자의 종말이다.

애당초 권력이란 진실의 함수와는 그다지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한가닥은 그들과 우리의 대조이다. 역시 진실의 함수와 비슷하게, 이땅의 권력은 책임의 함수와도 거의 무관한 곳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처럼 이땅의 언론이 한목소리로 질타하듯, ‘단군이래’의 규모라고도 하는 권력형 부패의 사태에 누구 하나 구체적으로 책임지고자 하는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권력의 무책임을 질타하는 언론은 정작 어떤 자리에 서있는가. 그저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정부의 관료들과 금융계 인사들, 그리고 검찰이나 정치인들의 책임을 질타하고 있어도 좋을만한 주제인가. 한때 언론쪽에도 검은 혐의를 씌웠던 ‘한보리스트’ 따위를 거론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보사태를 질의한 국회의원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투의 지적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어떤 국회의원도 묻지 않았던 그 시절에, 이땅의 언론은 과연 한보사태를 물었던 적이 있었던가. 국회의원이 묻지 않으면 언론 또한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나의 지론은 그따위 지엽말단적인 현상에만 갇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지론은 권력의 무한책임에 못지 않은 언론의 무한책임이라는 쪽에 무게가 쏠린다. 권력의 감시와 진실의 추구, 민주주의와 정의의 정립에 언론의 책임은 한계가 있을수 없다. 제한이 있을수 없다. 남의 무책임을 질타하는것도 언론의 책임이지만, 스스로의 무책임을 뼈저리게 각성하는 것도 언론의 책임이다.

그 어길수 없는 언론의 문맥에서 말하고자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뼈저린 자성 이외에 구제의 방법이 없다. 그러나 언론의 정도회복이라는 구제는 그 자성을 바탕으로, 오늘과 내일에 언론의 언론다운 구실을 다해나가는 정진의 축적을 통해서만 기약될 터이다. 한마디로 지난 날의 잘못은 접어두더라도 오는 날엔 잘못을 거듭하지는 말아야한다는 뜻이다.

미국과 일본의 저널리스트들은 워터게이트와 록키드사건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그들은 한강의 백사장에서 모래알을 훑어나가는 각고의 작업끝에, 권력이 숨기고자 했던 진실을 들추어내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정보환경과 우리의 그것이 동일하지는 않다. 때문에 진실을 추구하는 탐사보도의 작업은 더욱 어려울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드워드 기자의 토로를 다시 한번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는 이른바 ‘깊은 목소리(deep throat)라고 표현된 어떤 정보원이 워터게이트의 진실을 줄줄이 알려준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고개를 가로젖는다. “아직도 밝힐수 없는 그 ‘깊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전해준 정보는 도대체 정보라고도 말할수 없는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 사람도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지는 못했다. 우리는 걷고 또 걷고, 만나고 또 만나면서 거두어들인 파편의 정보들을 족보처럼 맞추어나갔던 것이다.

거듭 밝히거니와 나는 한보사태를 말하고 있지만 한보사태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보사태는 하나의 소재일뿐이다. 비단 한보사태만이 아니라 이땅의 언론은 언제가 되어야 <대통령의 음모>와 <타나카 카쿠에이 연구>와 같은 탐사보도의 노작을 생산해낼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나의 관심이며 기대이며, 또한 나의 목마름이다.

동서고금을 들먹일 나위도 없이 권력은 거의 진실과 가까운 이웃은 아니다. 오히려 허위와 가까운 이웃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민주주의의 제도는 언론이라는 감시의 기능을 ‘제4부’라는 이름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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