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각 언론은 생경한 인물을 뉴스메이커로 등장시킨다. 이름은 이한영. 조선(북한) 김정일 당 비서의 전 동거녀로 알려진 성혜림씨의 조카, 81년 남한으로 넘어온 조선의 로얄패밀리.

조선일보는 이씨와 어머니인 성혜랑씨와의 모자간 인터뷰를 세기적 특종이라는 이름을 내걸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조선 보도이후 이씨는 각 언론의 주요한 표적이 됐다. 그에게 ‘돈 세례’를 퍼부으며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했다.

안기부로부터 월사금이 끊긴 이씨 역시 정보 장사에 능했다. 필요에 의해 서로를 필요로 한 언론과 이씨는 근 1달여 동안 미확인 뉴스를 양산해 냈다.

그리고 1년. 이씨는 또 다시 언론의 뉴스메이커로 떠 올랐다. 이번에는 뇌사상태에 빠진 식물인간의 모습으로 언론에 등장한 이한영씨. 그의 삶속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곳은 두말할 것 없이 안기부와 언론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씨는 이 두 존재를 가장 저주했다.

지난해 8월 17일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이한영씨는 자신의 유일한 꿈은 ‘미국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딘가에 있을 어머님을 모시고 마누라·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나마 자신을 버티게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수차례 안기부에 미국행을 희망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들어올 ‘자유’는 허용했지만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당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도 토로했다. 약 3시간동안의 인터뷰 기간동안 그와 기자가 나눈 대화 소재는 대부분이 안기부와 언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13년간의 남한 생활중 안기부는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초 미국행을 희망했던 그를 한국사회로 인도한 것도 안기부였고 직장 알선, 성형 수술 등 그의 삶 곳곳에 안기부의 잔영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안기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특히 동아일보에서 출간한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집필 과정에서 안기부와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것 같았다.

당시 안기부는 이씨가 집필한 내용 가운데 안가 위치, 수사 내용 등 10여군데 대목 삭제를 요구했고 이씨는 이를 받아들일수 없다고 버텼다가 끝내 상당부분이 빠지거나 고쳐진채 나갈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로 이씨는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 주차장에서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멱살을 잡히는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가’에서 쫓겨났고 거처가 없던 그의 부인과 딸은 친정집에 들어갔다.

그가 언론에 보인 반응은 한 마디로 냉소 그 자체였다. 이씨는 “기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한마디만 들어도 그럴싸하게 기사로 만든다. 상황이 이처럼 꼬인 책임의 많은 부분이 언론에게 있다”며 언론의 작문 실력을 놀라워했다.

결정적으로 이모와 어머니의 망명이 매끄럽게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일부 언론의 보도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 가치에 비해 안기부와 언론이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굳이 이한영씨의 항변이 아니더라도 이번 이씨의 피살과 관련 언론이 ‘결과적 책임’은 면키 어렵다.

이씨를 맨처음 세상에 공개한 것이 언론이지만 언론은 그에 대해 일관되게 ‘상품’이라는 시각을 유지했다. 신변 위협이나 ‘처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성혜림씨 망명 사건이 터졌을 때는 이씨는 자신과 상대했던 일부 기자들에 대해선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안기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언론이 ‘무관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자신을 철저히 ‘이용’한 기자들이 자신을 둘러싼 ‘인간적’인 문제에 대해선 눈을 감자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이씨에게 언론은 또 서슬퍼런 ‘오보’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그래서 이씨 피습에 대한 언론의 책임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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