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일요스페셜’이 지난 2일 저녁 8시 창사 50주년 특집으로 방영한 ‘종묘 너구리’(연출 김규효PD·38)는 전혀 새로운 자연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개척했다. 그동안의 자연 다큐멘터리가 주로 ‘문명으로부터 유리된 자연’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종묘 너구리는 ‘문명과 인간 속의 자연’에 주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서울의 한복판인 종묘에 야생 너구리가 살고 있다는 다소 ‘토픽’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볼거리는 어느새 이 작품의 묵직한 주제를 둘러싸고 있는 당의(糖衣)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청자들은 너구리 일가족이 도심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엮어가는 탄생과 생존, 죽음의 드라마를 따라가면서 자연과 인간은 과연 공존할 수 없는가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김PD가 종묘의 너구리를 찍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1년 전인 지난해 2월 어느 신문에 실린 짤막한 기사를 본 뒤였다. 나흘을 무작정 뒤졌지만 너구리의 배설물과 털오라기만 발견했을 뿐 너구리의 꼬리도 보지 못했다. 다섯째날 드디어 너구리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인광을 발견, 이때부터 1년을 꼬박 김PD는 너구리와의 싸움, 아니 너구리와의 사랑에 들어갔다.

처음 한달은 촬영하기에 앞서 너구리의 활동시간과 동선을 파악하고 조명에 익숙해지도록 길들이는 데 모두 바쳤다. 그리고 마침내 하수구에서 다섯마리의 새끼를 갓 분만한 어미 너구리와 조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너구리 일가족의 종묘 드라마는 카메라에 잡히기 시작했다. 김PD는 촬영 기간 동안 안타까운 순간을 수없이 만나야 했다고 한다. 장마비로 인해 익사 직전에 놓인 너구리 새끼들을 발견했을 땐 죄스러움마저 느껴야 했다.

어미 너구리가 촬영을 의식해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는 하수구를 분만장소로 잡았고 그 결과 새끼 너구리들이 익사의 위기에 놓이지 않았는가 하는 죄스러움이었다. 인공호흡과 심장마사지를 통해 너구리 새끼들을 살려낸 것이 그나마 죄스러움을 덜게 해줬다.

그리고 기나긴 겨울철 종묘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너구리들이 종묘 앞 차도를 건너 세운상가까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사선을 넘나드는 모습을 찍으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문제를 수없이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어느 날 차도로 나선 너구리 가운데 한 마리가 차에 치여 숨진 사건은 문명에 대한 통렬한 경고라고 김PD는 말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 시청자들의 격려전화가 빗발쳤다. “토종 다큐멘터리를 보여준 KBS에 감사한다.” “너구리에게 사료를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김PD는 보람만큼 아쉬움도 많이 남았다고 한다. “외국에선 이런 다큐를 제작하는 데 관찰에만 1년을 투자한다. 그러나 우리 방송의 형편은 1년 내에 관찰과 촬영을 모두 마쳐야 하고 그것도 혼자서 작업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적 다큐는 제작비와 시간을 과감하게 투자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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